거울을 본다는 건 다분히 현실 속에서 남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의식하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거울 대신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는 건 현실보다는 사진 속에서,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내가 어떻게 보일지 더 신경 쓴다는 뜻일 수도 있다. 수시로 셀피를 찍어 올리면 좋아요의 환호와 환대로 채워지는 이 세계야말로 모두가 원하는 현실이다. 아이돌의 과한 메이크업이 화려한 조명으로 채워지는 무대를 위한 세팅이듯이, 이제 사람들은 현실보다는 이미지와 온라인에 보여지는 환경에 맞춰 자아의 매무새를 고친다.
---p.57 박지수, 「Selfobservation - Franziska Ostermann」 중에서
셀피는 자주 자기애나 허세의 상징처럼, ‘계집애들이나 하는 일’로 손쉽게 폄훼되곤 했지만, 셀피가 선사해준 안심의 감각은 조금도 훼손하고 싶지 않을 만큼 근사했다. 비록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방향으로 편집해서 타인의 눈앞에 내민다는 점에서, 셀피는 매우 현대적인 자아 연출 행위처럼 느껴졌다. 그래선지 나와 내 친구들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셀피와 빠르게 사랑에 빠졌다.
---p.90 김인정, 「셀피, ( ) 」 중에서
책임지지 못할 만큼 많은 양의 사진을 보고 찍고 있으며, 언제 내가 보여졌는지 알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렌즈에 감시당하고 있다. 내 얼굴은 비운의 주인공, 가난한 이미지가 되어 누군가의 손가락 끝으로 곧장 갈 수 있다. 한?번 게시한 나는 내가 삭제하더라도 소멸되지 않고 어디든 도착해 있다. ‘나’를 콘텐츠로 활용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불리한 일이란 걸 이 세대는 알고 있지 않은가. 나는 이 위태로운 이미지 생태계 안에서도 나를 찍지 않는 것보다 나를 찍는 힘, 나아가 발행하는 힘을 믿어보는 편이다. 그 이유는 넘나드는 사람들과 카메라 앞뒤를 오가며 확장된 외딴 세계를 목격한 시간이 지금의 나를 단단하게 지탱해준다는 사실 때문이다. 나르키소스 신화와 같이 이상화된 내 육체와 정신이 유일한 목적이자 종착지가 된다면 그 파멸을 막을 길이 없지만, 나를 도구 삼아 세계와 연결되고 감각하고자 한다면 그만큼 강렬한 도구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p.104 황예지, 「넘나드는 사람들」 중에서
현재의 커츠는 거의 정지한 시간 속에서 연습을 거듭하다 문득 그 사실을 깨닫는다. 어느 순간 자신과 기타가 그저 소리를 내는 하나의 시스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들은’ 것이다. 소리를 내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한 뒤, 사라져 가는 소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소리의 생멸 과정 자체가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답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소멸로 인해 완성된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나와 기타 사이에서 태어난 그 아름다운 소리는, 그러나 나와 기타의 소유물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나고 진다. 그 사실을 체득한 순간부터 음악 연습은 조금 다른 것이 된다. 그것은 더 아름다운 소리를 만드는 과정인 동시에, 그만큼 더 아름다워진 소리가 바로 내 것이라고 말하고픈 욕망을 잠재우는 일이 된다. 연습을 거듭하는 오늘의 커츠는 기타를 연주하는 동작 속에 남겨진 과거의 잔영들과 마주하며 거기에 담긴 욕망과 고통들을 하나씩 잠재운다. 음악에서 에고를 발라냄으로써 더욱 투명한 소리를 감지하는 것이다.
---p.109 최원호, 「사라지려는 이들의 낙원」 중에서
그가 몸담은 장소를 ‘자의식 지옥’이라고 이름 붙이려 한다. 자의식 지옥은 촘촘한 눈들로 둘러싸인 방이다. 세상 모두가 나를 재단하는데 그중 가장 엄격한 시선을 지닌 자는 나다. 거기서 나는 나인 게 너무 불편하고, 내가 죄다 망치고 있다는 확신만이 초 단위로 선명해진다. 별일 없이 지내다가도 삽시간에 그 방으로 끌려내려가는 일이 십 대 내내 허다했다. 시간이 흐른 뒤에는 ‘자의식 천국’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운이 좋은 날 누가 날 거기에 데려다주면 내가 나인 것이 그저 편안하기만 했다. 누가 이 천국을 지었는가? 멋진 타인들과 내가 지었다. 알게 모르게 땅을 다지고 초석을 깔고 기둥을 세운 것이다. 영원히 멋진 타인 같은 건 없을 테지만 어느 시절 우리가 좋은 이야기 속에 있었다는 사실만은 잘 변하지 않는다.
---p.116 이슬아, 「Selves-Portrait」 중에서
저는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드러내는 스스로의 모습이 무조건 일정한 정도로 과장되었다거나 왜곡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온라인의 자기 자신과 실제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일반화하는 것?- 특정 맥락과 시대의 특정 플랫폼 혹은 기술을 상정하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면 - 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저희는 이 삶을 살아가며 여러 정체성에 맞게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이는 아주 개인적이고도 공적인 방식으로 이뤄지죠. 사람이란?존재가 그렇듯이요. 이런 이유에서 저는 디지털 세계의 자아 역시 우리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불순물과 왜곡, 역할 수행 등이 합해진 존재라고 말입니다.
---p.127 지아 톨렌티노, 「더 나은 나: 셀피와 인터넷」 중에서
2년 전 테스토스테론을 투여한 이후로 더 이상 눈물을 흘릴 수 없다. 울 수 없다는 일은 참으로 낯설고 두려운 경험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전하는 일에 언제나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나의 여정을 모두 공유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고 느꼈다면서 고마움을 표시해주었다. 나는 자신의 내면과 힘겹게 싸우는 이들을 위해서 계속 나의 이야기를 공유할 것이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어떤 폭풍도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이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p.206 「마블 해리즈, 작가의 말」 중에서
그러나 더욱 놀랍고 섬뜩한 것은 바로 얼굴 사진을 보는 그 시선의 주체가 기계라는 것이다. 우리의 얼굴을 보는 시선은 기계 시각(machine vision) 혹은 컴퓨터 비전(computer vision)이다. 인물의 인격적인 아이콘 이미지였던 얼굴 사진이 점차 ‘예쁘고’, ‘귀여운’ 대량생산된 표준적 얼굴 이미지로 둔갑하며 사진 속에서 정작 얼굴을 숨길 때, 얼굴-사진의 윤리학을 떠맡는 것은 기계 시각이다. 컴퓨터는 쉼 없이 얼굴 사진을 보고 익히며 그 사진들 속에서 사진-이미지의 제국을 축성한다. 그러나 안면인식 기술이 얼굴에서 보려는 것은 단지 악의 씨앗과 징후만은 아니다. 그것은 얼굴 사진에서 희로애락을 찾아내고 그를 통해 마케팅 방침을 수립하고 선거 전략을 세우려 한다. 얼굴에서 자신이 길들이고 지배할 수 없는 타자를 찾으려 했던 레비나스의 철학적 모험은 기계 시각이 식별하는 얼굴 속에선 연기처럼 무효화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정황을 순순히 용인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술 사진으로서 초상사진의 위기가 회자된 지 오래임에도 여전히 우리가 초상사진의 정치적, 미학적 가능성을 포기할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얼굴을 은폐하는 사진의 세계 속에서 얼굴을 회복하는 사진-이미지를 찾아내려는 싸움은 어쩌면 동시대 사진의 가장 중요한 전장일지도 모른다.
---p.221 서동진, 「두려운 얼굴들 ? 사진의 윤리적 모험의 종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