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떠난 뒤, 나는 나와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했다. 소중한 이가 죽고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자살 유가족으로서 당면하고 감당해야 할 일은 무엇이었는지, 하루하루 어떤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고 살아갔는지…. 먼저 겪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필요했다. 똑같을 순 없어도 나에게 닥칠 일들에 대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도움을 얻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자살 유가족의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해마다 약 7만 명의 자살 유가족이 발생한다는 통계 자료와 며칠 전 누군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뿐이었다. 죽은 자의 이야기도 많지 않지만, 남겨진 자의 이야기는 더더욱 찾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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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를 마쳤다. 이제 나는 뭘 해야 할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사별도 처음인 데다 자살 유가족이라니. 주변에 물을 사람도 없었다. 휴대폰을 붙들고 닥치는 대로 검색을 시작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자살 유가족의 또 다른 이름을 알게 되었다. ‘자살 생존자’. 자살 시도 후 살아남은 이가 아니다. 가족이나 소중한 사람을 자살로 잃고 남겨진 이를 자살 생존자라고 한다. 나, 그리고 우리 가족을 말한다. 내가 자살 생존자라고? 일반적인 사별보다 몇 배 더한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고? 자살 고위험군에 속할 만큼 자살 위험성이 매우 높은 상태일 수 있다고? 나는 단숨에 나약하고 위험한 사람으로 분류된 것 같아 불쾌하면서도 두려웠다. 어떤 이유로든 소중한 사람을 잃으면 아프다.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이유로 아프고 슬프다. 그런데 일반 사별과 자살로 인한 사별이 다르다 말한다. 무엇이 다른 것일까. 무엇이 우리를 그리도 아프게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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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도 시계를 돌린다. 살아생전 오빠와 함께한 순간으로 돌아간다. 과거 자신의 말과 행동을 바꾼다. 그리고 스스로를 다그친다. 그러지 말았어야지. 다르게 말했어야지. 바람은 단 하나, 결과를 바꿔놓는 것이다. 그저 살아다오. 제발 살아만 다오. 아들이 여전히 살아 있는 모습으로 결말을 바꾸기 위해 시계를 돌리고 시나리오를 고친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영화 〈인셉션〉의 끝나지 않는 결말처럼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고 또 돌아간다. 멈추지 못한다. 우리가 끊임없이 ‘왜?’라고 질문한 건 답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저 살아달라는 부탁, 살려내고 싶다는 간절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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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세상을 떠났다. 사라졌다. 더 이상 볼 수 없다. 엄마는 너무나 갑작스레 아들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았다. 주말이면 늦잠 자는 아들을 깨워 점심을 먹여야 하는데, 주일이면 같이 교회에 가서 예배 방송실을 담당하는 아들을 봐야 하는데, 월말이면 관리비 내는 걸 잊지 말라고 챙기는 아들의 메시지가 울려야 하는데, 모든 것이 고요하다. 집에서도 교회에서도 휴대폰에서도 아들은 조용하다. 시시때때로 나타나야 할 아들의 목소리와 얼굴이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이 현실이 낯설고 믿기지 않아서 엄마는 주인 잃은 오빠의 휴대폰에 대고 공허한 질문을 외쳐댔다. 얘야, 어디 있니. 정말 간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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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은 개인의 선택을 넘어 사회적 타살이라는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엄마는 아들의 죽음을 전지전능하신 그분, 신의 계획으로 보았다. 신이 사랑하는 나의 아들을 데리고 갔다고 엄마는 믿었다. 고통스럽고 믿기지 않는 이 상황 역시 신의 의도라고 믿었다. 그 믿음 안에서 ‘왜 갔을까?’라는 질문은 ‘왜 데려갔을까?’로 바뀌어 있었다.
--- p.64
오빠가 남긴 글에는 출근에 대한 공포와 불안 그리고 일상적 무기력과 우울감이 담겨 있었다. 발기부전 증상으로 병원을 찾아갔지만 몸에 이상이 없다, 심리적인 요인인 것 같다는 답변만 받았다는 것도 블로그에 남긴 글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당연히 업무에도 지장이 생겼다. 잦은 실수와 낮은 업무 효율로 “요즘 매일 회사에서 사고만 친다”며 오빠는 자책했다. 그럼에도 오빠는 일을 놓지 않았다. 쉬지 않았다. 잘하고 싶고, 동료에게 혹은 회사에 피해주기 싫은 마음 때문이었다. 이미 과로로 망가져버린 몸과 마음. 그러면서도 고작 하루를 쉬고 나서는 또 금방 희망에 차올랐다.
--- pp.111~112
오빠의 3주기가 다가온다. 여전히 내 선택에 대해 의문이다. 잘한 선택이었을까. 이제라도 산재 신청을 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오빠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사에 제대로 묻지 못했다는 생각에 여전히 억울하고 괴롭다. 과로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오빠가 더 오래 살았을 거라는 확신, 열심히 일한 결과가 결국 죽음이었다는 억울함, 그리고 내가 제대로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똑같은 문제가 되풀이되고 있다는 자책감은 3년이 다 되도록 희미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커지기만 한다.
--- p.131
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 좀 봐요. 나는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도 알고, 아프고 충격적이었던 장면도 담담히 꺼내놓을 수 있어요. 나 참 대단하죠? 나 참 강하죠?’ 헷갈린다. 나는 정말 괜찮은 걸까? 괜찮다고 증명받고 인정받기 위해 괜찮은 척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 pp.136~137
한참 동안 행복을 부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오빠가 그렇게 떠났다고 해서 내게 행복한 순간이 있으면 안 될 이유는 없다. 나는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 애써 웃으며 억지스럽게 노력하자는 것이 아니라, 살랑이는 봄바람처럼 자연스럽게 스미는 행복 앞에서 기꺼이 웃음을 짓자는 의미다. 이제 나는 다가오는 순간의 기쁨도, 슬픔도 모두 피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순간의 나를 나는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나아갈 것이다.
--- p.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