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는 손도 잘 잡지 않는 독립된 두 여행자가 되었다.
낯선 곳에 도착했을 때, 아이는 내게 말한다.
“엄마가 삼십 분 뒤에 와. 난 여기서 얘네들과 놀고 있을게.”
이것이 우리의 주된 협상안이다.
“엄마, 한 시간만 더 놀다 와. 나 얘네들과 다 놀려면 멀었어.”
이것은 우리의 베스트 협상안이다.
아이가 낯선 동네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동안, 나는 골목을 돌아다닌다.
사람들과 수다를 떨거나 뭔가 끄적거리거나 그도 아니면 주저앉아 곧잘 공상에 빠진다.
한마디로, 우리는 이제 완벽하게 대책 없는 여행자가 되었다.
대책 없는 1.5인의 여행자로 떠돌며 세상에 다가가는 동안 세상도 우리에게 다가왔다.
잠든 아이를 안아주거나, 초대해 만찬을 베풀거나, 나무에 올라가 코코넛을 따주었다.
가난하거나 넉넉지 않았던 그들은 대부분 따스함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꾸려 간 가방보다 훨씬 커다란 마음의 선물로 채워진 채 집에 돌아왔다.
여전히 힘을 가진 자들은 커다란 나무를 베거나 국경을 넓히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만,
내가 아는 지구는 그 커다란 나무 밑, 국경과 국경을 경계 없이 넘나들며 돋아나는 선한
풀들로 인해 아직 아름다운 곳이다.
이 글은 그 아름다운 풀들과 만나는 첫 기록이다.--- 프롤로그 중에서
아이와 가지고 놀던 빵가루 쓰레받기를 부엌에 가져다놓는데 유습이 나를 부른다.
“그 쓰레받기 갖다 놓지 말아요. 내일도 그걸 가지고 바닷가로 가고,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가지고 바닷가로 가세요. 그리고 해가 질 무렵에 돌아오세요, 언제나처럼.”
그의 목소리가 사뭇 애처롭다. 뭐라 달리 할 말이 없어, 아직 생각 중이란 뜻으로 손가락을 머리에 갖다 댄다.
“가지 마요. 가지 마요. 여기 있어요.”
그는 모르고 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나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 이곳을 떠나는 일이다. 그의 섬세한 감성을 표현할 수 있는 곳, 그리고 표현해도 좋은 대상을 찾는 일이다. 올림포스에는 여자와 아이가 없다. 젊은 터키 남자들에게는 가혹한 곳이다. 그는 이곳을 떠나 헌신할 수 있는 일, 감성을 몇 백 배 연소시킬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말을 그에게 하지는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한다 한들, 그는 듣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밤 잘 생각해 보고 내일 아침에 확실히 말해 줄게요. 잘 자요.”
문가에서 멀어지는 내 뒷모습에 대고, 유습이 말한다.
“당신이 이곳에 있기만 해도 난 행복해져요. 테이블에 앉아서 JB와 놀기만 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아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아도 그냥 거기 있으면….”--- ‘당신이 거기 있으면 나는 행복해져요’ 중에서
비행기가 이륙했다.
이륙과 함께 기계 소리가 갑자기 커지자, 창밖을 내다보던 아이가 고개를 돌려 “엄마, 왜 이렇게 소리가 커?” 묻는데, 거친 기계음 때문일까? 때마침 그 목소리가 너무나 아기 같다. 발음마저 부정확한 어리디 어린 아기. 내가 저렇게 어린 것을 다그쳐 가며 여행을 했나 싶은 생각에, 울컥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과 대견한 마음이 한데 뒤섞여 아이를 꼬옥 끌어안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기특한 녀석,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았는지 믿을 수 없게도 내게 이렇게 말한다.
“엄마, 그동안 잘해줘서 고마워….”
모든 여행에는 질문과 답이 있다. 사실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공히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만, 그 질문과 답 사이의 멀고도 가까운 거리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여행이라는 틀을 꿈꾸고 떠난다. 먼 곳을 돌아 다시 제 안의 것을 들여다볼 용기와 지혜를 얻게 된다는 것, 이것은 수많은 예술 장르에서 차용된 서사 구조이기도 하려니와 탄생과 성장을 거쳐 죽음에 이르는 우리의 생이 최초에 의도된 구조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는 여행이라는 틀로써 주어진 일상의 틀을 부수고 나가는 것을 꿈꾸지만, 이 또한 커다란 생의 구조 속에서는 ‘작은 일상’일 뿐이다.
--- ‘그동안 잘해줘서 고마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