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뒤에 한 켜 더 쟁여진 방죽의 풀빛을 사랑합니다.
토란 속잎 안으로 숨는 이슬방울을 사랑합니다.
외딴 두메 옹달샘에 번지는 메아리결을 사랑합니다.
어쩌다 방 윗목에 내려오는 새벽 달빛을 사랑합니다.
화초보다는 쑥갓꽃이며, 감꽃이며, 목화꽃이며, 깨꽃을 사랑합니다.
초가지붕 위에 내리는 새하얀 서리를 사랑합니다.
무 구덩이에서 파낸 무들의노오란 순을 사랑합니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왔다는 담양의그 죽순을 사랑합니다.
고향의, 해질 무렵이면 정강이에 뻘을 묻히고 돌아오던 건강한 수부들을 사랑합니다.
지나가는 걸인을 불러들여 먹던 밥숟가락을 씻어서 건네주던 우리 할머니를 사랑합니다.
상여 뒤를 따라다니며 우느라고 눈가가 늘 짓물러 있던 바우네 할머니를 사랑합니다.
남의 허드렛일을 자기 일처럼 늦게까지 남아 하던 곰모 영감님을 사랑합니다.
명절 때면 막거리 기운에 코끝이 빨개져서 소고 하나만을 들고 농악대 뒤를 따라다니며
덩더쿵 덩더쿵 어깨춤이 신나던 복애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동네 머습 제사를 1백 년이란 긴 세월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지내고 있는 문경의 농바위골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죽으면서 동네 정자 앞에 있는 소나무한테 자기 재산의 절반인 논 15마지기를 상속시킨 예천의 이수목 노인을 사랑합니다.
눈 쌓인 겨울날이면 산짐승들이걱정되어서 산자락에 무며 고구마를 던져 놓는 광사 스님을 사랑합니다.
고향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고향 소리를 들려주고자 여치 1만 마리를 키우고 있는 전주의 서병윤씨를 사랑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 모든 것을 버무려서 그 누구도 아닌 한국의 아이로 복제하고 싶은
<<초등사과 밤배>>속의 주인공이 '난나(나는 나)'입니다.
풀꽃 하나도 아끼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다운 화평의 피를 가진 아이, 이 땅의 난나들이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산천과 융화해서사는 삶, 양적인 물질의 풍요보다는 생활의 질을 추구하는 삶, 그리고 보다 높은 인간적 사랑으로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되어 살아가기를 이 밤에 기도합니다.
---pp.29-31
내 작은 가슴 속에는, 저쪽의 받아주지 않는 거기에서 저 혼자 떨어져 익사하는 전화 벨 소리가 있고, 참깨를 털 듯 나를 거꾸로 집어들고 털면 소소소소 쏟아질 그리움이 있고, 살갗에 풀잎 금만 그어도 그대를 향해 툭 터지고 말 화살표를 띄운 피가 있다.
--- 머리말 중에서
고향에서는 그 연약한 혼자 몸으로 농사를 지었고 이웃 읍내로 이사 가서는 한동안 풀빵을 구워서 팔았고, 국수 장사를 하기도 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어린 손자의 학교 뒷바라지 때문이었다. 소설책을 보느라고 밤늦게 있어도 공부 열심히 한다고 생고구마라도 깎아 내오지 못하면 아파 하시던 할머니의 그 가슴.
미원이 처음 나왔을 때 그것이 무슨 비약인 양 찬장 속 깊은 곳에 감춰 주시던 그 안타까운 마음.
언젠가 우연한 자리에서 어떤 재벌의 재산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날은 특히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골동품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었는데 그 자리에서 문득 불문학자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 p.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