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고 연애 경험이 쌓일수록 고백하지 않고 혼자서 좋아하거나 상대는 반응이 전혀 없는데도 짝사랑하는 경우는 점차 줄어든다. 사는 것도 힘들고 피곤한데 그렇게까지 마음 쓸 여유가 없어서 그런가 보다. 그런데도 가슴 아픈 일이나 사랑의 고민이 전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서로의 호감을 어느 정도 확인하고 사귄다고 해도 안심할 수 있는 일상적인 연애나 견고한 관계의 궤도로 올라가는 일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의 진도를 나가는 속도나 마음의 온도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속도와 온도의 차이를 어떻게 줄이고, 어떻게 맞춰 가느냐에 따라 진지하고 견고한 관계로 들어갈 수 있는지 없는지가 정해진다. 그래서 처음부터 너무 좋은 티 내지 말고, 다 주지 말고, 적당히 튕기거나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한다. --- p.16
에리히 프롬은 일방적인 희생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랑을 주고받는 교환의 단계로만 생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아마 대부분의 현대인이 모든 관계는 주는 만큼 돌려받아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관계에서 균형에 맞게끔 정당하게 주고받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걸맞는 이야기가 아니다. 천 원 내고 백 원 거슬러 받는 상품 거래에 맞는 이야기다. 우리는 경제 원리에 맞춰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사는 일이 너무 당연하고, 상품의 교환은 자본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구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사랑도 상품 교환과 같은 것일까? 에리히 프롬은 그런 단계에 머무르기 싫다면 다르게 생각하라고 권유한다. 주기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아예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주는 사랑을 하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가능이나 할까? --- p.26
요즘은 조금 시들하지만 한때는 대학가의 꿈과 사랑, 낭만을 그린 드라마와 시트콤이 유행했다. 돌이켜보면 캠퍼스를 무대로 하는 드라마는 드라마 속 주인공 또래인 대학생이 아니라 대학에 가려고 애쓰는 고등학생을 위한 게 아니었나 싶다. 얼마 전 시험 기간에 대학 도서관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옆에서 여학생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난 대학 들어오면 정말 자기가 좋아하는 수업만 듣는 줄 알았어. 그리고 전공 공부만 하는 줄 알았지.” 아이고, 그게 아니라는 걸 이제 알았구나. 고등학생 때는, 드라마로만 볼 때는 그런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멋진 대학생들의 드라마는 현실에 지친 고등학생들을 달래기 위한 달콤한 거짓말 같다. 실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거나 혹은 사회에 나와서 어땠는지 떠올려보면, 사실 바뀐 건 없었다. 모든 상황이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으며, 별다를 것 없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곳에 있으니까. --- p.66
영어를 공부할 때 조건절이라는 것을 배운다. ‘만일 ~한다면, 나는 ~할 거야.’ 식의 가정이 들어간 문장이다. 조건이 있고, 그 조건 때문에 하는 행동은 노리는 바가 있는 행동이다. 노린다는 게 꼭 나쁜 뜻은 아니라 그리 순수하지 않은, 말 그대로 다른 것이 섞여 있는 행동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다른 조건이나 목적을 거는 표현을 칸트는 가언명법이라고 부른다. 가정을 하고 그 가정에 따라 움직이게 됨을 의미한다. 그러니 만일 사랑이 가언으로 표현된다면 그 사랑은 온전히 사랑만을 위한 것은 아닌 셈이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조건이 걸려 있는 건 변할 수밖에 없다. 칸트가 말하길, 조건을 걸거나 가정을 해서 앞뒤 상황 다 계산한 다음에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냥 가슴이 시켜서 하는 일이 순수한 일이라고 한다. 가언과 반대 형식인 정언명법으로 행동을 말할 수 있을 때가 순수한 것이고, 다른 어떤 것도 섞이지 않은 상태다. 가슴이 시킨다는 말은 양심적으로 행동한다는 것과 같다. --- p.91
돈과 외모에는 공통점이 있다. 겉으로 드러나서 확인 가능하다는 것과 본인이 쉽게 바꿀 수 없는, 날 때부터의 환경이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본인이 노력해서 쉽게 바꿀 수 없는 조건들을 따지면 속물일까? 만일 드러나는 조건을 따지는 것이 속물이라면 연애의 상대방을 탐색하는 우리는 모두 속물이다. 누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상대를 찾는 연애에는 어디에나 속물근성이 숨어 있다. 우리는 머릿속으로 열심히 계산기를 굴리고 있는 중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애써 변명하는 고상한 당신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첫눈에 반했다.” “불같은 감정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에 계산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라고도 한다. 글쎄, 그 사람에게 왜 반했고 왜 그토록 열렬히 빠지게 되었을까? 뭘 보고, 뭘 알아서? 혹시 관심법을 쓰는 걸까?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는 조건들과는 전혀 무관하게 상대의 내면에 빠져들었다고 말하는 걸까? --- p.126
진심으로 성실하게, 몸과 마음을 다해 헌신하는 일은 좋아 보인다. 그런데 그 헌신이 사실은 자기를 갉아먹고, 더 이상 기쁘지 않고, 괴롭고 힘들다면 관계를 오래 지속할 수 없다. 당신의 헌신은 어쩌면 헌신이 아니라 그저 ‘을’ 노릇을 자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더 좋아하고 더 잘해주면 연애 관계에서 을이 된다고 한다. 확실히 더 좋아하는 사람이 감정적으로 힘들 확률이 높기는 하다. 아무래도 더 많이 좋아할수록 더 많이 참고 배려하고 헌신하게 될 테니까. 많이 집중하고 노력한다는 것은, 그 노력과 수고만큼이나 속을 끓이고 상처받을 일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먼저 좋아한 사람이 더 많이 배려하고 더 많이 좋아해야 할까? 먼저 좋아하기 시작해서 더 많이 좋아하면 그게 바로 연애 관계에서 ‘을’이 되는 걸까? 그럴 바에는 마음을 꽁꽁 싸매고 좋으면서 싫은 척하거나 아예 덜 줘야 할까? --- p.157~158
남녀를 불문하고 연인 사이에 공통으로 하는 답정너식 질문은 “자기 나 사랑해?”가 아닐까 싶다. “나를 사랑하기는 하니?”라거나 “날 사랑한 적은 있어?”와 같은 변형된 문항도 있다. 이런 질문을 자주 하는 연인을 두어서 피곤한가? 사실 두 번째 질문이나 세 번째 질문은 한 번만 들어도 피곤하고, 때로는 짜증이 나기도 한다. 듣자마자 ‘앗, 함정이다!’라는 느낌이 확 오지 않는가? 불이 나면 화재 경고음이 울려 퍼지듯이 이 질문을 듣는 순간 뇌를 포함한 모든 신체기관에 경고음을 울려야 할 것만 같고, 전투태세를 갖춰야 할 것만 같다. ‘나한테 어쩌라고 저런 질문을 하지? 어쩌자고 이런 말을 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이 질문에서 우리가 철학적으로 탐색해볼 만한 요소는 바로 여기에 있다. --- p.200~201
만일 당신이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면 괴로움과 실의에 빠져 있을 때도 당신은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일 당신이 사랑이 부족한 채로 자라났다면 어떨까? 당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야지만 그 허기짐과 구멍 뚫린 공간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스스로 자신을 잘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 꿈꾸는 사랑은 다른 한쪽에게 엄청난 부담이 될 수 있다. 한쪽이 다른 쪽을 떠맡아 대신 멀쩡해야 한다는 부담이다. 상대방을 좋아하고 아끼는 건 상대방도 어쩌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마음을 대신 떠맡아주는 일과는 다른데 말이다. 나도 한계가 있는 보통 사람인데, 사람들은 종종 사랑이라는 이유로 그 모든 것을 당연히 감당해주기를 요구한다. 아무리 사랑해도, 힘이 달리는 건 어쩔 수가 없다.
--- p.240~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