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나무의 마음이 되어
--- 99/12/15 이희인(heen@ktcf.co.kr)
집 앞에 벌거벗고 선 다 죽어가는 치자나무 화분을 두고 사람들은 한마디씩 거들었다. 이거 다른 거랑 함께 두면 다른 거 다 죽여요! 저 허옇게 들러붙은 게 중국서 들어온 전염병인데, 저거 못 고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머닌 묵묵히 줄기에 붙은 허연 딱지들을 맨손으로 일일이 뜯어 내셨다. 이웃에서 병들었다고 버리려는 걸 당신이 맡겠다고 얻어오신 거였다. 지금 화단 한켠에는 그 '놈' 치자나무가 무성히 잘 자라고 있다. 지난가을 청초한 하얀 꽃이 어찌나 고왔던지...
<양화소록>을 읽는 내내 마당의 꽃나무들을 지극 정성으로 길러내던 어머니의 곱은 손이 생각났다. 때때로 내 것인 화초나 내 꽃들을 키워본 적이 있는 나로서는 어머니의 손속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게 얼마나 큰 재주인지를 안다. 까탈스런 꽃나무 '녀석'들에게 다가가기란 당최 쉬운 일이 아니다. 푹푹 썩은 거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반죽하고 솎아낼 줄 아는 손길 정도라야 '녀석'들은 마음을 놓는다.
빠르게 질러가는 가치들이 대접받는 시대에, 꽃과 나무에 지극 정성을 다하는 일은 외면당하기 쉬운 노릇이다. 하물며 되는대로 키우는 것도 아니고 꽃과 나무의 본성(本性)을 살펴 그에 맞게 키워야 한다는 강희안의 '양생법(養生法)'은 여유 작작한 사람의 호사 취미로 여겨지기 딱 알맞다. 어느 세월에 꽃의 성질을 살피고 익힐 것인가? 어느 세월에 나무가 곧게 자라 나의 벗이 되기를 바랄 것인가? 강희안의 <양화소록>은 그러한 즉, 느림과 에돌아 가는 자세를 가르치는 책이기도 하다.
식물도 낯을 가린다거나, 음악을 좋아한다는 등의 얘기는 더 이상 문학적 수사만은 아니다. '곡식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큰다'는 속담은 농부의 근면을 권고하는 말일 테지만, 식물의 역동성을 일찌감치 파악한 조상의 혜안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의식 없고 자극을 느낄 줄 모르는 사람을 일컫는 '식물인간'이라는 말의 부당성에 대한 시비도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식물도 스트레스를 느끼며 닥쳐오는 자극에 대비할 줄 아는 활동적인 존재란 사실이 과학적으로 속속 밝혀지고 있는 추세다.
강희안이 가르치는 '양생법'도 따지고 보면 식물을 생동하는 감성적 존재로 파악하는 인식 위에 서 있다. 무엇을 꺼리는지, 뭘 좋아하는지 하는 언급들이 경험이든 문헌의 인용이든 곳곳에 보인다. 매 난 국 죽을 군자로 숭앙한 선현들의 과장도 어쩌면 이러한 인식을 극한까지 몰고 간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강희안의 마음에 비친 꽃과 나무들은 분명 울고 웃고 까탈부릴 줄 아는, 펄펄 살아 숨쉬는 놈들이다.
<양화소록>은 참 예쁜 책이다. 하드커버의 장정과 편집도 예쁘고, 꽃과 나무를 애정 어린 눈으로 담아낸 선명한 사진들도 예쁘다. 풀꽃처럼 절제된 활자도 단아하고, 부록으로 원문을 덧붙인 아이디어도 보인다. 무엇보다도 오륙백 년 전 한 선비의 꽃과 나무를 대하는 마음이 참으로 아름답다.
소나무, 향나무를 비롯하여 매난국죽 사군자들이 앞부분에 놓이고 연꽃, 석류, 치자, 동백, 백일홍, 영산홍 등이 이어지는데, 이들은 우리에게 먼 것들이 아니다. 아스팔트 보도를 조금만 벗어나면 무시로 만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면서도 이 꽃나무들은 한자 문화권의 시문이나 문인화 등에 곧잘 등장하는 주요 등장'인물'들이므로, 지극히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꽃나무들이라 할 수 있다.
저자 강희안은 세종의 처조카 되는 왕실 인척으로, 정인지 최항 등과 초기 한글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긴 선비이면서, <고사관수도>라는 낯익은 그림을 그린 서화가이기도 하다. 심심산곡 골짜기 바위에 턱을 괴고 몽롱한 백일몽을 즐기고 있는 노옹을 그린 그 마음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저작인 <양화소록>에도 녹아 있는 듯싶다. 거기엔 준엄하고 결곡한 선비 기질은 물론, 흐르는 세상의 결에 몸을 내맡길 줄 아는 단아한 풍류도 있다.
<양화소록>이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원예서라고는 하지만 이 책으로 꽃과 나무 재배에 실질적인 도움을 얻을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육 백 년이란 시간적 거리가 그리 녹록한 것은 아닐 뿐더러, 아무리 잘 설명된 저작일지라도 꽃나무를 키우는 노하우 같은 건 책으로 얻어질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꽃과 나무에 대한 본격적인 수필이나 잘 짜여진 문학작품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예쁘기만 한 책을 무엇에다 쓸 것인가?
개인적으로 나는, 강희안이 설파하는 본성(本性)까지는 아니더라도 꽃과 나무들의 이름이나 하나하나 마음에 담아두고 싶었다. 그놈들이 어떤 색깔과 모양을 하고 있고 언제 피는지 정도는 알고 싶었다. 그리하여 산행을 하다 무심코 만난 붉은 꽃을 보고 이건 영산홍이네, 이건 동백이네 할 줄 알고 싶었다. 맛깔나는 사진에 원문을 보충해주는 친절한 해설이 붙어있어 그러한 목적이라면 넉넉히 달성된 듯싶다. 본성을 알기 전에 이름을 알고, 이름을 알자 곧 본성이 다가올 것 같다. 나의 소용은 거기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