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은 예수님의 신성의 신비를 강조하면서 실제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진리로 소개했다. 그런데 누가는, 과학적 지식의 한계에 부딪혀 좌절감을 느끼고 겸손해진 당대의 모든 의사가 그랬듯이 인간의 곤궁에 절대적으로 공감했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에 이끌려 스스로 그렇게 취약한 존재가 되셨다는 사실에 경탄했다.
누가는 인간의 연약한 육신을 입은 전능하신 창조주를 보여준다. 그의 복음서가 묘사하고 있는 분은 한순간도 인간과 멀리 떨어져 있거나 무심한 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누가가 묘사하고 있는 그 사람, 예수는 오히려 이 세상의 혼란과 혼동 속으로 들어와 우리의 결점과 약점, 고통과 격정, 슬픔과 질병에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천상에서 내려오신다. --- p. 17 서론: 의사가 본 예수
사가랴의 항변을 번역한 헬라어는 유독 단호하다. “나는 늙었습니다!” 가브리엘은 그 노인의 항변에 어조를 맞춰 응수했다. “나는 가브리엘이라!” 그는 사실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네 항변(‘늙었다’)을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영웅’이다. 나는 하나님을 얼굴을 맞대고 보았고, 그분의 왕좌 앞에서 이 메시지를 가지고 바로 내려오는 길이다. 너는 분명 성경에 나오는 내 이름을 기억할 테니 내가 아주 오랫동안 이 일을 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사가랴에게 주어진 징벌은 역설적이면서 상징적이다. 그는 불신의 대가로 벙어리가 되어 그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놀라운 소식을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 사이의 중재자로 하나님이 임명하신 사제인 사가랴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고, 그로 인해 목소리를 빼앗겼다. 그가 보낸 9개월의 침묵 기간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 전에 있었던 400년간의 침묵기를 재현했다. --- p. 53 “임신? 이 나이에? 말도 안 돼요!”(눅 1:5-25)
흥미롭게도 그 회당장의 딸이 살아온 세월만큼 그 병에 시달렸다. 그 12년의 세월 동안 소녀는 야이로 가정의 기쁨이었고, 한 의지가지없는 병든 여인은 치욕과 실의에 빠져 지냈다. 그 관리의 외동딸(아마도 무남독녀였을 것이다)은 유대인 사회에서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 부유한 아버지 덕택에 그녀는 갈릴리의 예비 구혼자들에게 잠재된 신붓감으로 여겨졌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 이름 모를 여인은 공동체의 변방에 살면서 어떤 남자도 가까이 해서는 안 되었다(레 15:24).
그 여인은 필사적으로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 손가락으로 예수님의 옷 “가장자리”(아마도 술을 지칭하는 듯하다)를 만졌다. 당시의 독실한 유대인들은 옷단에 4개의 술이 달린 긴 겉옷을 입었다. 전통적으로 그 술들은 주님의 명령을 상징했다(민 15:37-40, 신 22:12). 급하게 서두를 때는 네 개의 귀퉁이 중 하나를 어깨에 걸쳐 걸려 넘어지는 걸 방지했다. 그 여인은 아마도 예수님의 어깨에 걸쳐진 술을 만졌을 것이다. --- p. 267 소중하지 않거나,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없다(눅 8:40-56)
예수님은 늘 예언적으로 말씀하셨지만-즉,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는 것-장차 있을 일을 예언하신 적은 거의 없었다. 미래의 역사에 대한 계시가 다 그렇듯이 주님의 예언은 흥미를 자극할 정도로는 상세하지만 좌절감을 느낄 정도로 모호하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후에야 제자들은 더 많은 것을 이해했다. 그러니 우리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많은 것이 베일에 가려 있다.
장차 있을 일에 대한 주님의 강론이 우리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지 않을지라도, 그것으로 충분하다. 미래가 와야 비로소 메워질 수 있는 간극을 한탄하지 말고 예수님이 제공해주신 정보를 시간을 들여 흡수하면 충분하다. 어쨌든, 예언은 미래와 결부된 일들을 세세히 다 알기 위해서 주어진 게 아니다. 예언은 때가 이르렀을 때 어떻게 순종할지를 알기 위해서 주어졌다. 지도처럼, 예언은 당신이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서 그곳에 도달할 것인지를 말해준다. 이제 지도를 가졌으니 조심해서 운전하라!
--- p. 517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기(눅 17:2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