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사도들 모두 행동으로 ‘복음을 전한’ 적이 없고 그럴 수도 없었다. 말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주장에는 경솔한 생각과 아무렇게나 하는 말이 내재해 있다. 그렇게 주장하려면 복음에서 인지적 정보를 빼거나, ‘전파하다’(preach)라는 용어를 모호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두 가지 전략 모두 혼란을 일으킬 뿐이다. … 우리가 예수님과 사도들에게서 듣는 메시지에는 한결같이 인지적인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다른 사람에게 알리거나 전달하려면 필히 언어적 코드를 사용해야 하는 그런 내용이다. … 성경 어디에도 행위 자체가 어떤 것을 ‘전파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떤 것을 ‘전파하라’고 할 때는 항상 언어적인 내용을 말하는 것이다.
---「2. 복음은 언어적인 것이다」중에서
우리 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들으려 하지 않지만,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사야 시대처럼 하나님의 진리를 들으면 불신만 더 깊어질 것이다. 그렇더라도 문화적 현실 때문에 복음전파 사역에 대한 이해가 흐트러지거나,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 복음전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말로 증거하는 행위다. 전하는 사람의 감정이나 약점에 따라 복음의 능력은 달라지지 않는다. … 내가 반대 의견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나 자신이 그 말씀대로 신실하게 살지 못하더라도, 그로 인해 복음의 능력이 무색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 우리가 아무리 잘해도, 복음은 우리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능력이 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3. 복음전파는 언어적인 것이다」중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행위가 언어적 증거를 보충해 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복음이 어떻게 들리느냐에 영향을 미쳐 복음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다. 행위 자체로는 복음을 전할 수 없지만, 분명히 복음을 더 돋보이게 할 수 있고, 전달자인 우리를 더 믿을 만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전하는 말을 ‘빛나게 하는’[코스메오(kosmeo), ‘영광스럽게 꾸미다, 위엄을 높이다’, 딛 2:10] 것이다. … 사도 바울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 3:6). 오직 하나님만이 자라게 하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과정에 우리의 말과 행위를 사용하기로 하셨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정해 주신 역할이 있다. 우리가 그 역할을 수행하지 않거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더라도 복음은 능력을 잃지 않는다. 복음의 능력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그분께로 이끌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하고 계신 일, 앞으로 하실 일에 대한 좋은 소식을 사용하려는 성령의 계획에서 비롯되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문제는 우리가 그 과정에서 맡은 역할이다. 도움이 될 것인가, 아니면 방해가 될 것인가?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우리의 말과 행위로 참여하도록 계획하셨다. 그 두 가지 소명에 충성하는 것은 우리의 임무다.
---「10. 복음을 빛나게 하라」중에서
누가복음 4장을 우리 시대에 맞게 적용하려면, 가장 중요한 점을 가장 중요한 위치에 두어야 한다.
즉, 왕을 떠나서는 왕국이 존재할 수 없다. 주창자들이 이 구절을 사회 정치적 안건으로 축소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하나님나라는 가난한 자를 돕고, 갇힌 자에게 다가가고, 눈 먼 자를 치료해 주고, 억눌린 자를 자유롭게 해주는 일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환원주의자의 방식은 그 구절의 핵심을 심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이런 일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나라는 무엇보다도 왕에 관한 것이다. 이 각각의 일 중심에 계신 예수님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 자신, 즉 예수님이 누구이고, 무슨 일을 하셨으며, 무슨 일을 하시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하실 지가 가난한 자들이 간절히 원하는 궁극적인 복음인 것이다. … 사실 예수님이 항상 가난한 자를 물질적 가난에서 해방시켜주거나, 죄수를 감옥에서 나오게 하거나, 눈 먼 자를 고쳐주거나, 압제를 없애주지는 않으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주셨는가?
예수님은 자신을 주셨다. 그리고 마지막 날 하나님나라가 완성될 때 이런 일들이 이루어질 거라는 궁극적인 약속을 주셨다. 예수님은 포로 된 자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시는 분이다. 갇힌 자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실 수 있는 분이다. 억눌린 자에게 궁극적인 자유를 주시는 분이다. 그리고 영적인 시각을 주시는 분이다. 이런 것이 하나님나라의 참된 열매다.
---「13. 잘못 인용되는 세 가지 핵심 구절」중에서
‘필요는 소명이 아니다.’ 우리의 말이든 행동이든 세상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는 한참 모자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기는 불가능하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짐을 지실 수 있다.
모든 필요에 반응하려다가 결국 능력이 부족한 것을 알게 되어 죄책감과 절망감에 빠지면 실패하고 지치게 된다.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을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필요가 아무리 합당하더라도, 그 필요보다는 하나님의 소명에 근거하여 결정을 내리는 것이 훨씬 더 좋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지만 어떤 일은 할 수 있다. 끝이 없어 보이는 세상의 필요 중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것은 무엇인가? 즉, 성벽 건축에서 내가 맡은 일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면 세상의 필요가 우리의 능력을 훨씬 능가할 때 포기하거나 좌절과 패배감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희생적인 일에 초점을 두도록 하자.
---「결론? 총정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