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다가는 365일 뒤에 내년이 되어도 다를 바 없으리라는 예언이었다. --- p.11
아버지라면 새해 첫날에도 근무했을 것이다. 살아 있었다면 말이다. 엄마의 상을 치른 뒤 영오는 집을 나왔고, 아버지는 인천으로 이사했다. 단칸방과 원룸이라고 이름 붙은 곳에서 부녀는 각자도생했다. 그래도 통하는 구석이라면 둘 다 월세라는 점. 아버지는 삼십 짜리고 영오는 사십 짜리였다. --- p.14
엄마가 폐암으로 죽고부터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죽기까지 사 년 동안, 영오는 아버지를 예닐곱 번쯤 만나러 갔다. 그중 반은 추석 무렵이었는데, 갈 때마다 아버지는 경비실에서 근무 중이었다. 생긴 지 반백 년은 됐다는 중학교였다. 사과나 몇 알 사서 들여다볼 때마다 그놈의 경비실이 싸구려 관 같았다.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외동딸이 왔는데도 왔냐, 소리도 제대로 않는 아버지. 내가 여길 또 오느니 콱 죽고 말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 p.15
영오는 아버지와 원수도, 적도 아니었다. 사이가 멀 뿐이었다. 수평선과 바다는 맞닿은 듯 보여도 그 사이에 드넓은 허공이 있다. 오영오는 오호석에게서 갈라져 나왔지만 둘 사이에도 허공이, 공백이 있었다. 그 여백 어디쯤에 궁금한 것 많은 여자애 하나 끼어든다고 해서 대수일까. 나이 서른이 넘으면 어쩔 도리 없이 어른이 되어야 하고, 어른이라면 어른답게 굴어야 한다. --- p.30
사람이라기보다는 병자였다. 치료와 재발, 전이와 항암제, 고통과 구토. 최후의 몸무게는 33킬로그램. 영오는 3시 3분이나 3시 33분에 시계를 보게 되면 기분이 가라앉았다. 33번 버스가 싫었고 텔레비전에서 33번 채널을 삭제했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서른셋이라는 나이가 싫다. 잊지 못했나 보다. --- p.37~38
한마디로 개떡 같다. 시커먼 눈길에 떨어진 개떡.
아버지는 죽고 나서야 나를 호명했다. ‘영오에게’라면서. 아버지는 영오가 누구인지 알고나 불렀을까? 아버지, 저 아세요? 전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데요? 너무 섭섭해하지는 마시고요.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 그게 오영오니까요. --- p.40
오영오. 난 너라는 문제집을 서른세 해째 풀고 있어. 넌 정말 개떡 같은 책이야. 문제는 많은데 답이 없어. 삶의 길목마다, 일상의 고비마다, 지뢰처럼 포진한 질문이 당장 답하라며 날 다그쳐. --- p.40
어찌 되었든 이렇게, 오늘도 돌아왔다. 열쇠를 신발장 거울에 붙은 조그만 고리에 걸었다. 이 하얀 플라스틱 고리를 샀을 때, 비닐 포장에는 200그램 이하의 물건만 걸라고 적혀 있었다. 영오는 가끔 고리를 살펴본다. 떨어지거나 망가질 기미가 보이지는 않지만 고리와 거울 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는 모른다. 영오는 그 작고 가벼운 플라스틱 쪼가리가 꼭 자기 자신 같았다. --- p.54
말끝에 어리둥절해진다. 내가 왜 이러지, 이 사람에게? 애틋한 딸처럼, 상심한 유족처럼? 하지만 어디 가서 누구에게 이런 말을 할까. 이제야 말이다. 누가 뭐래도, 어찌 됐든, 홍강주는 아버지가 고른 남자였다. 아버지가 보내서 온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당신한테도 이 정도 말 들을 책임은 있다고. 영오는 억지를 부렸다. --- p.66
세상에는 어떻게 하다 보니 어떻게든 되어버리고, 지나고 보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를 일투성이다. 어린 시절, 영오는 아버지가 식탁 의자에 앉아 있을 때마다 다리 밑에 들어가 여기가 우리 집이야, 했다. 아버지의 마르고 짧은 다리가 자기를 대들보처럼 지켜주리라 믿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영오를 무릎으로 밀어내며 화를 냈다. 정신 사납게, 저리 가! 영오는 울음을 터뜨렸고, 그 뒤로는 아버지 가까이 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앉아 있든, 서 있든. 그날 아버지는 피곤했거나 일터에서 모욕을 당했거나 친구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가 거절당했을 것이다. 아니면 몸이 아팠을지도 모른다. 이유가 있든 없든, 많든 적든, 별것 아닌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일이 가시처럼 기억에 박히기도 한다. 어떤 틈은 희미한 실금에서부터 벌어지고, 어떤 관계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죄목만으로도 망가진다. --- p.69
길거리에서 태어나 자란 고양이들, 집에서 태어나 길로 내쫓긴 고양이들, 너무 배가 고프면 이런 것도 먹겠지. 끈도 먹고 나뭇잎도 먹고 흙도 먹고. 무더운 여름, 죽어서 바싹 마른 매미를 물고 골목길로 사라지던 고양이를 보았다. 가로등 불빛을 받아 그림자를 늘어뜨린 고양이. 굶주린 고양이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 p.117
누군가 이 못에 줄을 감고 목을 매다는 모습이 떠올랐다. 이를테면 작고 가벼운 사람이…… 사람은 외롭다. 혼자 사는 노인……, 그렇지 않을까. 미지는 자기 몸이 프라이팬에 깨뜨린 달걀흰자처럼 하얗게 굳어간다고 느꼈다. 안 돼, 여기선 싫어! 펄에 무릎까지 파묻힌 다리를 빼듯이 용을 썼다. 노루발장도리를 든 채 서서 골똘히 뭔가 생각이라도 하는 듯 보이지만 미지는 지금,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중이다. 못의 형상을 한 독사가 쉿, 붉은 혀를 날름거렸다. --- p.121
“상처 없는 사람 없어. 여기 다치고, 저기 파이고, 죽을 때까지 죄다 흉터야. 같은 데 다쳤다고 한 곡절에 한마음이냐, 그건 또 아닌지만서도 같은 자리 아파본 사람끼리는 아 하면 아 하지 어 하진 않아.” --- p.171
사람은 언제 슬픈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 따뜻한 살과 살을 맞대며 이 또한 식으리라 인정할 때.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상처를 입고 똑같은 진물을 흘리며 똑같은 슬픔을 몇 번이고 반복하리라 예감할 때. 그때 나와 너의 연약함, 우리의 숙명 앞에서 경건해진다. 엄마. 벽을 보고 울던 엄마, 몰래 담배를 피우던 엄마, 죽음 앞에서 평온해진 엄마. 엄마의 상처에 어떤 고름이 맺혔기에, 무슨 딱지가 앉았기에. --- p.183
“가끔 말이죠, 그때로 돌아가서 주인공이 되고 싶어요. 형의 죽음을 스쳐 지나가는 조연이 아니라, 형 옆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마주하는 주인공 말이에요.” --- p.186
“사람을 안다는 건 참 어려워. 그렇지? 이해한다는 건 더 어렵고. 그 사람이 나든 남이든 말이야.” --- p.193
사는 게 너무 바빠. 숨과 숨 사이가 서울에서 부산보다 멀어. 엄마는 여기 없으니까, 이건 그냥 표지판이니까, 괜찮죠? 내가 누군가의 흔적이라는 걸 잊지 않을게. 엄마가 나라는 표지판을 이 세상에 세우고 갔다는 걸 잊지 않을게. --- p.270
“나 말이여, 실은 말이여, 오래 살 거 같어. 죽도록 오래 살 거 같어…….” --- p.293
일 년 넘게 목소리로만 사귀어온 두 사람, 마주 본다. 목소리에 얼굴이 생겼다. 눈과 코와 입이, 웃음과 표정과 눈빛이 생겼다. 살갗 위로 핏줄이 도드라지고 살갗 아래로 피가 흐른다. 나무 속의 물줄기처럼. --- p.299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를 지나 여기 다다른 당신에게 말하고 싶어요. 이제 괜찮다고요. 곧 괜찮아질 거라고요. 당신은 영오이면서 미지니까요. 당신은 결국 우리니까요. 우리는 함께 나아갑니다. 벽을 뚫고 그 너머로 넘어갑니다. 어떤 벽은 와르르 무너지고 어떤 벽은 스르륵 사라져요. 포기하지 마세요. 우리는 괜찮습니다.
--- p.308~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