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이게 웬일일까요? 한 글자 두 글자, 센텐스 바이 센텐스, 주어, 동사, 부사, 형용사 따위를 맞추어가면서 그 뜻을 생각해보는 순간, 아니! 막연하지만 그 의미가 통달케 되면서 펼쳐지는 광막한 사유의 세계, 전 우주가 나의 의식권 내에서 기발한 춤을 추기 시작하는데 나는 정말 무지막지한 충격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 p.20
이것은 반불교다! 이것은 불교가 아니다! 이것은 불교의 모든 논리를 근본에서부터 파괴하는 전혀 새로운 논리다! 불교를 불교다웁게 만드는 모든 그룬트Grund(땅바닥, 근거, 기초)를 파멸시키는 다이나마이트다! 아니! 불교라는 종교가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종교냐? 종교가 반종교의 논리를 자기의 최상의 언설로서 모시고 있다니! --- p.21~22
나는 그 순간 종교보다 인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하나의 대오大悟였지요. 제도화 된 종교의 규범은 인간에게 덮어씌워진 겉껍데기라는 것! 껍데기는 가라! 나는 그 체험을 통하여 목사의 옷도 벗었고 승려의 옷도 벗었습니다. 그리고 무전제의 철학의 길만을 고집하며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 p.27
해월海月(1827년생)과 경허鏡虛(1849년생)! 나이는 해월이 한 세대 위이지만 이 두 사람은 같은 시기에 같은 민중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경허는 철저히 개인적이며 내면적 수양을 통해 새로운 정신사적 혁명을 수립하려고 했고, 해월은 철저히 공동체적이며 사회조직적 운동을 통해 정치사적 혁명을 수립하려고 했습니다. 두 사람 다 조선역사의 개벽을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 p.57~58
서산대사가 팔도도총섭이 되어 의승義僧의 총궐기를 호소하니 순식간에 전국에서 5,000여 명의 승군이 조직되었다고 합니다. 서산대사의 역량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지요. 서산대사는 의승군을 거느리고 명군明軍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탈환하고 서울을 탈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 p.36~37
서산은 수행자로서도 탁월한 인물이지만 매우 심오한 사상가이기도 합니다. 선禪? 교敎 양면을 깊게 통달한 사람입니다. …… 하여튼 조선 중기에 서산과 같은 큰 인물이 스님들의 구심점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 p.44
바로 경허처럼 단단한 학식, 그것도 한학의 기초를 다진 스님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죠. 경허는 세칭 이단비도異端非道의 스님, 막행막식의 선승처럼 이해되고 있지만 경허처럼 무서운 학승이 없고, 그의 싯구에 담긴 한학의 소양은 그저 흉내만 내는 스님들의 화려함이 미칠 수 없지요. --- p.49
그러나 경허는 말합니다: “내려놓으라!” 짐을 내려놓는데 전혀 예수의 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내려놓으면 됩니다. 부인과 남편과 사소한 일로 싸우고 그것이 짐이 됩니다. 그냥 내려놓으면 될 일을 계속 가지고 다니면서 이를 갈지요. …… 이 한마디만 제대로 이해해도 한평생 정신과 의사를 찾아갈 일은 없을 것입니다. --- p.77~78
“부처님은 이 천장사에만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 못 먹고 못 있는 사람들에게 보시하는 것이 부처님께 시주하는 것과 똑같은 것, 머슴이나 하인이나 백성들을 잘 보살펴주시면 바로 그것이야말로 최상의 불공입니다.” --- p.83
우리나라의 불교전통이야말로 당?송의 불학을 뛰어넘는 우리민족의 고유한, 독자적인 삶과 가치와 느낌의 결정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었죠. 이것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만이 우리민족의 새로운 정신사적 활로라는 것을 이 조선땅의 미래세대들에게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 방편으로 내가 택한 불교의 진리체계가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는 것입니다. --- p.112~113
그러니까 아주 쉽게 말하자면, 선이니 삼매니 요가니 하는 말들이 뭐 대단히 어려운 철학적 용어가 아니라 “정신집중” 정도의 아주 비근한 인도말의 다양한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죠. ……
선(댜나), 삼매, 요가 등등은 본시 인도사람들의 생활습관 속에 배어있는 수행방식일 뿐, 그것이 그러한 생활습관과 분리되어 있는 어떤 지고한 철학적 경지나 신비한 체험, 혹은 인간의 정신이 도달해야만 하는 어떤 실체적 코스모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 p.116~117
밥 먹고 똥 싸는 것, 졸리면 자곤 하는 것이 선禪이다? 이 깊은 뜻을 조금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이 결코 쉽게 넘어가는 일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임제는 여기서 “일상의 삶” 그 모든 것이 선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는 모든 종교적 환상의 실체성을 거부하고 있을 뿐입니다. --- p.120쪽
움직이는 모든 현상은 항상됨이 없다. 인과에 의해 끊임없이 변한다
모든 것이 고苦다! 아~ 고통스럽다!
모든 다르마는 아我가 없다. 주체가 없다! 자기동일성의 지속이 없다!
번뇌의 불길을 끄자! 그러면 고요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게 불교의 알파-오메가입니다. 불교의 전부입니다. 아니! 불교가 이렇게 쉽단 말이오? --- p.133~134
반야경이 성립하면서 대승불교라는 것이 생겨났다고 말할 수도 있겠고, “대승불교”라는 어떤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나면서 반야경전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대승불교”라는 게 도대체 뭔지, 그리고 또 소승이라는 게 도대체 뭔지, 반야경전들과 『반야심경』과의 관계가 무엇인지, 이런 것들이 충분히 얘기되어야만, 여러분들이 [반야심경]을 알 수 있게 될 것 같아요. --- p.151
기나긴 불교사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또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승불교의 종착지는 선종이었다.” 선불교라는 것은 대승불교의 모든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구현한 실천불교의 정점입니다. 불교는 선종을 통해서만 법난을 이겨낼 수 있었고, 우리나라 조선왕조시대에만 해도 선종의 독자적이고 실천적인 성격 때문에 그 통불교적인 포용성을 상실하지 않고 순결한 모습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 p.158
우선 대승불교은 싯달타의 가르침을 따르는 초기불교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대승불교는 싯달타의 종교가 아니라 보살의 종교입니다. 대승불교는 이미 싯달타의 가르침을 준수하겠다는 사람들의 종교가 아닌, 보살들, 즉 스스로 싯달타가 되겠다고 갈망하는 보살들의 종교입니다..
--- p.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