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누구도 증오하고 싶지 않아, 엘리엇.”
“나도 알아.”
“누군가를 증오하면 그럴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까맣게 변해버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냈다.
“엄마에게 그렇게 말해, 싫음 안 해도 돼. 하지만 엄마가 스파이크가 박힌 야구화를 신고 다닌다고 해서 굳이 널 밟고 지나가라고 드러누울 필요는 없어.”
그녀가 날 바라봤다.
“어휴, 그건 좀 바보 같은 비유다.”
그녀는 아직도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웃기 시작했다.
난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사랑해.”
그녀는 조용히 있었다. 그녀 속에 스며들면서, 그녀를 부드럽게 해주는 그런 침묵에 잠겨 있었다.
“잘 됐네.”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깊어졌고, 숨이 가빠졌고, 눈은 촉촉해졌다.
“나도 널 사랑하니까.”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내 팔에 기대면서, 내 품으로 들어왔다.
사랑에 관해서라면 난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엘리엇과 내가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이건 마치 우리 둘 다 다이빙대에 올라가 서로를 보면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은 채 떨어지는 매 순간을 즐긴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냥 다이빙대 위에서 몸을 사리고 있거나 아니면 다이빙할 때 받을 충격에 대비하려고 무진 애를 쓰는 동안 말이다.
아니면 엄마 같은 사람들도 있다. 다이빙대에서 뛰어내리는 걸 포기하고, 그들이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것은 그냥 물속을 걸어 다니는 거라고, 발만 적시는 거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내가 좋아했던 드라마 중 하나인 ‘연애시대’에 나오는 대사 중에 이런 대사가 있다.
‘언제부터 장래희망을 이야기 하지 않게 된 걸까?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고, 일 년 뒤가 지금과 다르리라는 기대가 없을 때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루를 견뎌 낼 뿐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연애를 한다. 내일을 기다리게 하고, 미래를 꿈꾸며 가슴 설레게 하는 것. 연애란... 어른들의 장래희망 같은 것.’
당시 이 대사를 들었을 때 뭔가가 내 가슴 한 구석을 툭 치고 지나간 것 같은 작은 충격을 받았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일상에서 우리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면서 총천연색으로 물들일 수 있는 유일한 사건, 연애. 우리는 살아가면서 작게는 서너 번에서 많게는 수십 번의 연애를 하게 된다. 그런 연애사에서도 가장 인상적이면서 평생 동안 사라지지 않는 연애는 바로 첫사랑이 아닐까.
그런 아련하고 풋풋한 첫사랑, 미묘한 가슴 떨림의 진수인 첫사랑에 대한 아주 예쁜 소설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빨강머리 앤처럼 빨갛고 숱이 많은 머리에 초록색 눈동자가 아름다운 소녀 칼리오페는 어느 날 키는 껑충 크면서 검푸른 눈빛의 소년 엘리엇을 만나게 된다. 둘은 첫 눈에 걷잡을 수 없이 끌리게 되지만 날 감동시킨 건 엘리엇의 독백이었다. 예쁜 소녀는 길가에 채일 정도로 많고 많지만 엘리엇의 눈길을 끈 그 소녀는 마음속의 성에 갇혀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외로움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엘리엇은 이름도 모르는 그 소녀의 성으로 들어가 그 외로움을 달래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면서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한편 칼리오페는 화학약품 때문에 입술이 초록색으로 변한 엘리엇이 말을 걸어오자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숨이 가빠오고 그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 증상을 겪게 된다. 그렇다!
우리 모두의 가슴 한 구석에 묻어 놓은 바로 그 첫사랑의 징후가 시작된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콩닥콩닥 가슴이 뛰고, 좋아하는 그나 그녀가 우울해보이면 나까지 덩달아 우울해지고, 그 사람이 웃을 수만 있다면 사정없이 망가질 수 있다는 그 마음자세. 그 사람의 조건이나 배경이나 능력이 아니라 그냥 미소가 좋고, 눈빛이 귀엽고, 하얀 손에서 눈을 뗄 수 없어 좋아하던 시절이 인생에 한 번쯤은 있지 않았을까? 이런 추억이 없다면 인생이 상당히 가난한 사람일지도...
‘자정에 먹는 스크램블드 에그’는 이런 첫사랑에 빠진 소년과 소녀가 만나는 이야기를 유머러스하면서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가고 있다. 소년과 소녀가 만나서 사랑하는 이야기 외에도 중년의 사랑이 그윽한 분위기로 펼쳐지고, 거기에 크리스천 다이어트 캠프와 르네상스 시대를 재현한 축제라는 두 가지 이질적인 배경을 무대로 해서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 기상천외한 사건들을 만들어간다.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자식과 부모간의 애정을 다루고 있고, 피를 나누지 않아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서 새롭게 가족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은 남과 여 두 작가가 만나서 썼다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호흡을 자랑하며 매끄럽게 흐르고 있다. 마치 냉정과 열정 사이의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나토리처럼 브래드 바클리와 헤더 헤플러는 솜씨 좋게 칼리오페와 엘리엇의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재치 있고 재미있게 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이야기를 써냈다.
웃음과 감동과 사랑을 이처럼 따뜻하고 예쁘게 그려낸 소설도 흔치 않을 것이란 말로 역자 후기를 마무리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따뜻하게 데운 우유 한 잔과 초콜릿 쿠키를 먹으며 이 소설을 읽으면 금상첨화라는 점을 기억하시길.^^
---역자 후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