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은 모래알같이 바스러지는 게 좋다. 찐득거리고 흔적이 남는 것은 불쾌할 뿐이다. 손안에서 빠져나갈 때 약간의 아쉬움은 되려 그 찰나를 더 반짝이게 한다.
----- p.20~21, 「웃어넘기고 싶을 때」 중에서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누군가 너무 좋아져서 우는 날에야 내 마음을 자각하곤 했다
----- p.22, 「웃어넘기고 싶을 때」 중에서
완벽한 이상형을 만났다고 생각하다가도 어떻게든 흠집을 찾아내는 게 당신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흠집이 있고 당신은 틈을 비집는 것에 귀신같은 사람이므로 언젠가는 실망하고 말 것이다. 이제 당신은 알아야 한다, 이 흠집 내기에 브레이크를 거는 게 좋겠단 것을. 이 못된 버릇은 반복될수록 그 속도를 높인다. 결국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게 당신의 목표라면 모르겠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감이 좀 다르지 않은가?
--- p.26~27, 「그리워할 때」 중에서
내가 겪는 모든 방황은 어디에도 깊게 엮이고 싶지 않고, 모든 것을 중립적으로 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 p.107, 「나서고 싶지 않을 때」 중에서
빛에는 늘 그림자가 지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빛을 보면 항상 그 단면의 그림자를 떠올리려 노력한다. 빛에만 홀려 뛰어드는 불나방이 되지 않으려는 것이다. 한때 그림을 잠깐 배우러 다닌 적이 있었는데, 어둠을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고 들었다. 어둠의 경계가 도화지에 선과 모양을 빚기 때문이다.
--- p.133, 「나만 아는 것 같을 때」 중에서
나는 여성의 외로움에 관해 이제껏 충분히 이야기되지 않은 방식으로 따뜻하고 쓸쓸하게 말하려 한다. 사막 위 선인장처럼 오롯하게 우뚝 서서 고즈넉한 외로움을 즐기는 여성들이 있다고. 버려지는 게 아니라, 버리고 상처받는 게 아니라, 그저 요령껏 굽이지어 다니는 여성들도 있다고. 각자 거리를 두고서라도 따로 또 같이 걷는다면 우리는 혼자도 괴짜도 아니지 않느냐고.
--- p.149, 「회피형 여성을 말하는 방법」 중에서
나는 내가 돌연변이일 거라 생각했다. 어딘가, 이 세계에 적응을 잘 못 하는 것도 같았다. 몇 가지 기억들을 갖고 네 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란색의 내 몸만 한 장난감 자동차 위에 올라가서 춤을 추다가 떨어져 뒤통수를 꿰맸던 밤, 주차장에서 열려 있던 맨홀에 빠져 얼굴 절반을 멍으로 물들인 날, 그리고 이유 모를 모종의 강박에 사로잡혀 화이트보드에 가족들의 이름을 하나씩 써내려갔던 기억도 있다. 내가 나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 이따금, 또는 세계를 직조하는 실낱들이 나를 분해해가는 감각이 들 때. 그래서 그런 상상도 해 봤다. 원래 나였던 영혼은 깨진 뒤통수 뒤로, 또는 맨홀 아래로 굴러가 사라져서 내가 아니었던 무언가가 나를 차지한 게 아닐지.
--- p.189, 「운명에 대한 단상들」 중에서
그리고 나는 감사했다, 한계가 분명한 이 욕망의 허황됨을 꿰뚫어볼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에. 남자의 자비로운 손길을 갈구하여 힘들게 얻어내는 것들이 여성 본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 p.219, 「고독의 우물」 중에서
‘여성이 2등 시민의 취급을 받고 있음’을 파고들고 그 폭력과 억압의 기제를 분석하는 과정 자체가 자학 아니냐는 조롱이 들릴 때, 또한 자신도 그것을 의문하게 될 때, 우리는 오로지 사유의 힘으로 고통스러운 현실을 올바르게 직시해야만 한다.
--- p.224, 「터프 이너프, 진실을 직시하는 강인함에 대하여」 중에서
상대가 사랑을 아낌없이 전달해오는 순간들이 있다. 바짝 두려워진다면 회피형 인간들이여, 다음 주문을 외우며 자신을 진정시켜라. ‘사랑한다는 게 약속이 아님을 기억하자’. 우리가 하는 건 대단히 굉장하게 영원불멸한 세기의 사랑이 아니니까, 다만 그 순간에 자신의 마음을 전달할 방법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뿐이었던 거지. 그러니 당신의 마음이 변한다 해도, 나중에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어도 적어도 이 순간의 당신은 날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그걸 표현하고 있었단 걸 기억해두면 될 테다
--- p.249, 「믿고 싶다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