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옷을 벗고 달리는 늙은 라이언 맥긴리와 그의 친구들을 상상해볼 수 있다. 메마른 피부에는 잔주름이 가득하다. 팔다리는 가늘고 배는 불룩 나왔다. 페니스는 힘없이 물렁물렁하게 처져 있다. 아무도 그들의 살을 보거나 만지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제 그들의 모습은 어느 누구의 관음도 즐거움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젊음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런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도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존재할 수 있는 권한을 받는 일이다. 게이 소년 라이언 맥긴리가 친구들을 찍는 것으로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시간은 지났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그가 캐스팅 전문가를 고용해서 어린 모델을 뽑는 이유다. 예술가 라이언 맥긴리는 마치 영화감독처럼 현장을 조율하고 지시한다.
--- p.98, 김현호, 〈늙은 라이언 맥긴리, 맨해튼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되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가진 능력 중 하나는 그의 위대함과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 그 능력은 완전히 실용적인 것이었다. 즉각적인 촬영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때, 브레송은 피사체로 선택된 사람이 알아차리기 전에 충분한 거리까지 접근하면서 초점을 맞추고 프레이밍을 했으며 도착 지점에 다다르자마자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셔터를 누르자마자 빠르게 촬영 위치를 벗어났다. 피사체가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무렵에 그는 이미 발길을 돌려 움직이는 중이었다. 이 일화를 처음 책에서 보았을 때 나는 소형 저고도 폭격기를 떠올렸다. 고속으로 목표에 접근해 ‘슈팅’을 하고 급격히 진로와 고도를 바꾸어 대공포의 추격을 따돌리는 은빛의 작은 폭격기. 위대한 사진가에게서 전쟁 무기의 특징을 떠올린 것은 결례일지도, 심지어 부당한 행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스냅 사진가들이 원할 만한 이 재빠른 움직임은 실제로 스냅 사진을 촬영할 때 발생할 수 있는 각종 시비를 피하기 위한 회피 기동이다. 위험한 장소 -그 아름다운 곳-을 재빨리 벗어나는 움직임.
--- p.102, 최원호, 〈원죄〉
사진수집가인 로버트 잭슨(Robert E. Jackson)은 스냅 사진을 전문적으로 모아 2007년부터 쭉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인스타그램과 아이폰 세대가 누릴 수 없는 스냅샷의 묘미를 설파해온 사람이었다. 그에게 스냅 사진이란 우연과 실수가 자아내는 ‘뜻밖의 미학’이었다. 또한 그는 스냅 사진이 사진(집)을 소유하던 사람들만의 특권이라고 여겼다. 나는 여기서 잭슨을 시대 부적응자나 꼰대로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주장 중 되짚어보고픈 부분은 따로 있다. ‘스냅샷의 종언’을 주장하는 잭슨은 그 이유로 과거에 스냅 사진은 ‘우리’라는 차원을 의식했다면 요즘 세대에겐 ‘나’라는 차원만 중요하다보니 스냅의 미덕이 사라지고 있다 말한 바 있다.
스냅샷 하면 떠오르는 소심함, 수줍음, 결단력, 과감함, 용기, 계기, 우발, 돌발, 재치, 우연, 필연, 천연덕스러움, 자연스러움, 고의, 연출, 상황, 조건, 사건, 결심, 의심…… 어쩌면 잭슨이 말한 ‘우리’란 언급된 단어들의 기운에 짓눌려 있는 우리인지 모른다.
--- p.114, 김신식, 〈누군가 세렌디피티를 외칠 때, 나는 담배라도 배워볼까 했다〉
잘 모르겠는데 좋다는 건 사실 대단한 거죠. 사랑에 빠지는 거니까. 그러니까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2017년에 잘 모르겠는 무언가와 두려움 없이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요? 여러 해 동안 이어지는 어떤 긴 계절의 주기가 있다면, 올해는 그런 사치스럽고 용감한 관객을 기대하기는 어려워요. 올해는 해명하고 이해하고 분별하려고 노력을 좀 해야 하는 국면이에요. 그럴 때가 됐죠. 사실은 나는 뭐가 별로였다거나, 그게 왜 별로인 것 같았다거나, 결국 내가 관심 있는 건 이쪽이라거나, 이 정도 선은 지켰으면 좋겠다거나, 그런 걸 각자 고민해야 되는데, 문제는 그러다 보니까 관객으로서는 좀 재미가 없다는 거예요. 올해는 전시도 전부 개인전 중심이고 가끔 있는 단체전도 대부분 개인전 모음처럼 가고, 각자가 차곡차곡 만드는 작은 세계들이 있는데 이것들이 놓이고 보일 수 있는 맥락이 너무 앙상해진 것 같아요. 이 작가랑 저 작가가 무슨 상관이냐, 이 작가가 하는 자기 작업과 그것을 구경하는 관객은 또 무슨 상관이냐, 아주 극단적으로 가면 그런 고립만 남으니까요. 이게 다들 그렇게 애써서 결국 이렇게 점점 더 부서지기만 하는 것 같을 때는 사실 좀 무섭죠.
--- p.268, 윤원화, 〈전시 셔틀: “작가/기획자는 자기 일을 하면 되는데, 관객은 뭘 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