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플레처: (...) 과연 큐레이팅에 대한 또 다른 새로운 책이 필요할까요?
폴 오닐: 물론입니다. 사실 저는 더 많은 책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큐레이팅에 관련된 쟁점과, 이러한 쟁점이 논의되는 형식 모두에 대한 보다 다양한 접근 방식이 있어야겠지요. 큐레토리얼 실천이 계속 진화하면서, 그러한 발전에 비판적으로 상응하는 출판물이 필요합니다. (...)
동시대 미술계 내에서 큐레이터라는 존재의 가시성이 증대된 현상-동시대 미술계 내에서 큐레이터는 도처에 존재하지만 큐레이팅 분야가 팽창하고 있는데 반해 그 효능을 둘러싼 비평은 부족한 실정입니다.
--- p.13, 「여는 글: 애니 플레처가 인터뷰한 폴 오닐」 중에서
큐레이팅은 때때로 자의식이 강한 일로 비춰진다. 오늘날의 예술가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긴 하지만 종종 곤혹스러움을 야기한다. 만약 예술가의 작품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이는 그가 일개 분투하는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사기라면, 이는 우리의 모든 자본주의 문화가 사기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예술가가 하는 일은 예술작품으로 나타나므로 꽤 알기 쉽다. ‘예술은 어떻게 보여야만 하나요?’, ‘그건 무슨 뜻인가요?’와 같이 전형적인 속물스러운 질문을 큐레이터에 관한 질문으로 대입하자면, ‘큐레이터는 누구인가요?’와 같은 큐레이터의 대리적 행위와 주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대체될 수 있다. 하지만 큐레이터는 누군가가 아니기에 이 질문은 성립되지 않는다. 큐레이터는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다. 중개인에 대한 존재론은 없다. 중개인은 매개의 행위 안에서, 그리고 매개를 통해 주체성을 얻는 수행적인,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다.
--- p.34, 쇠렌 안드레아센, 라르스 방 라르센 「중개인: 매개에 관한 대화의 시작」 중에서
전시는 관객이 미술과 작품을 접할 수 있게 하고, 특정 서사와 역사 및 아이디어를 활성화시키는 중요한 교차점이다. 더불어 전시의 모든 디스플레이 양식은 미술가와 미술, 미술제도, 그리고 관객 사이에 관계를 구축하고, 보는 형식과 의식(ritual)을 만든다. 이는 바로 전시가 의미를 부여하거나 새로운 의미를 만들 수 있는 힘, 맥락을 창조하고 관객을 고려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표준화된 전시 양식과 형식, 디스플레이 관례는 비평적인 재고가 필요하고 전복될 수도 있어야 한다. 전시 기획의 맥락적 전략은 예술 산업, 더 나아가 문화 안에서의 관계 재생산을 통해 분류화와 계층화에 저항하고 도전할 수 있게 한다.
--- p.39, 줄리 아울트 「그룹 머테리얼의 1980년대 세 가지 활동」 중에서
미술제도는 생존을 위해 스스로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환상을 필요로 하고, 이 환상이 바로 궁극적으로 미술제도의 불확정적인 성격에 맞서 스스로를 방어한다. 서구 국가에서 근대 미술은 공통의 역사(들), 즉 공유된 가치에 기초한 수많은 미술제도 간의 상대적 조화에 맞춰 구조화되었다고 여겨진다. 이 같은 질서 속에서 생산과 시장 사이의 긴장에는 비평과 미술제도의 중재자와 같은 존재가 있었을 것이다.
--- p.53, 카를로스 바수알도 「불안정한 미술제도」 중에서
1990년대 중반 이후 문화 이벤트가 세계와 지역을 만나게 하는 이상적인 문법이 되면서 맥락 특정적(context-specific)인 국제 전시는 도시 부흥 및 문화 관광화와 결합되었다. 그리하여 어떤 주제를 가진 전시 제목은 유치 도시의 이름에 ‘비엔날레’ 또는 ‘인터내셔널’을 붙인 이름으로 대체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이스탄불 비엔날레와 같이 지역 명칭이 바로 비엔날레의 제목이 되었다. 문화 관광화와 그 중요성 간의 딜레마에도 불구하고, 장소를 국제 전시를 위한 주제이자 현장, 이 둘 모두로 홍보하는 것은 예술을 구시대적인 장소 개념에 예속시킬 수 있는 위험도 있다.
--- p.117, 클레어 도허티 「부적절한 장소를 큐레이팅하고 있다...」 중에서
비엔날레에 대한 회의론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주 다양한 문화적, 지리적 맥락을 지닌 수많은 비엔날레를 봐왔기 때문에 단순히 회의적이는 않습니다. 그리고 단지 몇몇의 비엔날레만이 요하네스버그 비엔날레와 도큐멘타, 그리고 베니스 비엔날레와 같은 규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 제가 배운 중요한 교훈은 비엔날레가 세계의 아주 다른 지역에 예술이 부족하다는 믿음을 타파시켰다는 것입니다. 비엔날레는 큐레이터가 더 깊은 주의력을 갖게 합니다.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나 앙리 살라(Anri Sala)와 같은 작가의 예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비엔날레 없이 그들의 작품이 국제 무대에 소개되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한계와 바로 동시대 미술 영역의 제한성에 대해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 저는 더 많아지면, 더 재미있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누구도 너무 많은 미술관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 p.136, 오쿠이 엔위저 「정전을 넘어선 큐레이팅」 중에서
나는 〈유토피아 스테이션〉의 가장 큰 장점이 기능적인 유토피아가 되고자 하는 동기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라 주장한다. 보다 담론적이고 일시적인 전시 구조의 모델은 그 주체의 일반적인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고, 어떤 전시 기간이나 디스플레이의 순간 내내 유토피아적으로 ‘되기’를 유지할 수 있다.
--- p.158, 리암 길릭 「기능적인 유토피아를 위해?...」 중에서
전시는 공중을 만들기 위해 공중을 상상하고, 공중을 둘러싼 하나의 세계-지평-를 생산해야만 한다. 그래서 당신이 지금의 세상에 만족하고 있다면, 늘 그렇듯이 전시를 만들고, 그 전시 형식과 순환을 반복해야 한다. 반대로 당신이 미술계라는 측면과 보다 폭넓은 지정학적인 의미에서 이 세계에 대해 행복하지 않다면, 우리는 다른 전시, 말하자면 다른 주체들과 상상들을 만들어야만 한다.
--- p.221, 사이먼 샤이크 「구성적 효과: 큐레이터의 테크닉」 중에서
“어쩌면 우리는 대화만으로도 무언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라는 다소 낙관적인 성찰에서조차 담론적인 것(the discursive)의 가치는 그것이 실제 ‘행위’를 대신한다는 데에 있다. ‘행위’가 결과적으로 양가성의 원인이 된다 할지라도 말이다. (...) 담론적인 것의 가치는 상업성의 가치와는 확연하게 대조된다. 따라서 비판적 의사소통의 경험은 ‘소비자 중심’의 경험에 대립한다. (...) 다시 말해, 도구화되지 않고 강압적이지 않고 시장화되지 않은 거래의 독립적 가치에 관한 문제이다. 여기에서 표현의 자유란 자율적 표현이라는 의미, 즉 정치적 권력 관계에서 비롯된 검열이나 사회적 의무 관계의 책임에서 자유로운 발언만큼이나 시장 관계에 속박된 행위로부터도 자유로운 발언을 뜻한다.
--- p.246, 믹 윌슨 「큐레토리얼 계기와 담론적 전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