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남자의 턱을 들어 올리고 입을 벌렸다. 그것의 길쭉한 손가락들이 집게처럼 남자의 혀를 위아래로 찍듯이 집고서 쑥 잡아당겼다. 남자의 혀가 순식간에 찢겨 나오며 입안에 피가 찰박찰박 고였다. 고통 때문에 남자가 경련을 일으켰다.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턱을 타고 줄줄 흘러내린 피가 흙바닥에 고이는가 싶더니 그대로 스며들어 흔적도 남지 않았다. --- p.12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것을 보았다. 나와 똑같이 생긴 그것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온몸의 피가 증발한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것은 더 이상 내게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내 얼굴을 한 그것이 물었다.
―내가 누구야? (……)
“모…… 몰라.”
―아니, 넌 알고 있어. 말해봐, 내가 누구야?
“알 게 뭐야, 내 흉내를 내봐야 넌 내가 아니야.”
―하지만 난 너와 얼굴이 똑같지.
“네가 내 얼굴을 훔친 거잖아.”
그것이 키득거리며 턱을 들었다. 쭉 뻗어 올라간 그것의 목에 핏줄처럼 보이는 것들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피부색이 짙어지면서 벌거벗은 상반신 전체에 기묘한 형태의 결이 생겼다. --- p.22
나는 그것이 누군가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곤충의 날개처럼 가느다란 그물 무늬로 뒤덮인 피부, 어쩌면 무늬가 아니라 결인 것 같기도 했다. 암청색, 황금색, 적갈색, 흑갈색, 황갈색, 황토색…… 무표정한 그 얼굴의 피부색은 시시각각 변했다. 눈썹은 없고 이마뼈가 도드라졌다. 움푹 팬 고랑처럼 깊고 긴 눈구멍 속에 눈동자가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깊이 모를 어둠뿐. --- p.66
조명이 꺼지고 박수가 터져 나오고 다시 조명이 켜졌다. 잠깐 동안 무대는 텅 빈 채였다. 이윽고 배우들이 차례로 무대 위에 등장해 인사했다. 하지만 용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주연배우가 무대 인사에 나오지 않자 관객들이 웅성거렸다. (……) 설마……?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저 숲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게 뭔가. 아니다. 무대 옆에도 스태프가 있었다. 관객과 스태프 모두 합쳐 6백여 명이 지켜보는 중에 어찌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질 수가 있단 말인다. --- p.107
머리 나무의 소리가 울리자 다른 소리나무들도 기다렸다는 듯 튀어 올랐다. 죽어 있던 나무들의 무미건조한 소리가 머리 나무의 소리를 통해 살아 숨 쉬는 소리로 바뀌었다. 소리는 텅 빈 공간에 잠겨 있던 무언가를 퍼 올려 사방에 흩뿌렸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거기엔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을 자기도 알지 못해 꺼내 보려는 욕구가 있었다. 두드릴 때마다 깊은 심지 속에 박혀 있던 단단한 응어리들이 깨지며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 p.116~117
두 개의 검은 발이 슬그머니 벌어졌다. 그 사이로 또 하나의 발이 고개를 내밀었다. 세 개의 발이 사부작사부작 움직이는 것을 본 모두의 머리끝이 곤두섰다. 아홉 번째 소리나무가 와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비가 저토록 세찬 소리를 뿌리며 쏟아지는데 우리는 고요의 한가운데 있었다. --- p.233~234
또다시 천장과 바닥에서 소리나무들의 발 구르는 소리가 사납게 지나갔다. 연서가 울부짖으며 창문을 가리켰다. 돌아보니 기괴한 얼굴들이 비닐 창을 짓누르며 다투어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일그러진 가면 같은 얼굴들은 기어이 비닐을 찢고 창을 통과했다. 벌거벗은 어깨가 빠져나왔다. 암갈색의 거무스름하고 매끄러운 피부, 갈퀴처럼 휜 단단한 손가락들이 창틀과 벽을 타고 덩굴처럼 뻗어 내렸다. 둥그스름한 검은 하체가 미끄러지듯이 흘러 들어오면서 주름이 잡혔다. 그 사이로 앞코가 뾰족하게 들린 세 개의 발끝이 보였다. --- p.236
“여기 두 여자 중 하나는 여왕이고 나머지 하나는 여왕의 그림자요. 일명 허수아비라고 하지. 그래서 이 두 여자가 한 몸인 것처럼 포개져 있는 거요. 하나이면서 둘인 존재이기 때문에. 이 두 여자는 서로 얽혀 있는 등나무요. 놀이는 이 등나무 여왕으로부터 시작되지.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고 셋이 아홉이 되는 놀이, 사람과 나무가 벌이는 자리 뺏기 놀이.” --- p.285~286
종목은 힘겹게 고개를 들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목이 부러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우물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창아의 하얀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종목은 아득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창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뒤통수를 가린 머리카락을 갈랐다. 목덜미의 얼룩점이 드러났다. 얼룩점이 연서의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안녕, 종목아! 오랜만이야. --- p.311
위험한 액체가 지하의 나무 계단 아홉 개와 나무 벽을 타고 그 안쪽까지 흘러내려 깊숙이 적시는 동안, 종목은 다른 휘발유 통의 뚜껑을 열고 작업장 여기저기에 흘렸다. 이윽고 판자문 앞으로 다시 돌아온 그가 말했다.
“네가 태이는 홀릴 수 있어도 나한텐 어림없어. 너와 함께 여길 태워버릴 거야. 그것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아무것도 더 남아 있지 않도록 말이야.”
--- p.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