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동안 동무를 담당한 사람으로서 한마디만 하겠다. 죽지 마라!”
김대좌의 목소리는 한 박자 느리게 남자의 귀로 흘러 들어갔다. 빗소리에 섞여 은밀하게 전해진 ‘죽지 마라’는 말은 짧지만 세상에서 무엇보다 가장 중대한 임무였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위대한 조국의 영광을 두 눈으로 보고 죽어라! 그래도 죽어야 한다면, 전설이 된 다음 죽도록!”---p.9
“믿을 수 없어. 남조선 아새끼들 뭔 기타를 그리 잘 치네!”
미끄럼틀에 걸터앉은 리해랑의 구시렁거림이 계속되었다.
“보컬 그 간나 새끼가 내 기타는 중딩 수준이라며 지가 쳐보는데, 와, 잘 치더만.”
류환은 리해랑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짐짓 진지한 자세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기깟 오디션, 연습해서 붙으면 되지. 우리가 누구야. 무슨 일이든 해내는 공화국 전사 아닌가!”
“기래, 맞다우!”
리해랑은 벌떡 일어나 난데없이 가방에서 기타를 꺼냈다.
“내래 손가락에 피가 터지도록 쳐서 남조선 아새끼들에게 인민의 록을 보여주갔어!”
제법 심각한 리해랑을 보며 류환은 혼자 실실댔다.---p.80
해진은 비가 쏟아지는 기지 안 담벼락에 기대앉아 삶은 달rif을 우걱우걱 삼켰다. 쏟아지는 비가 눈물을 씻었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 입대했지만, 자신을 살게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언제나 혼자라는 외로움과 싸워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그는 류환을 만나기를 고대했다. 류환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겼지만 기지 안에서 유일하게 해진이 의지한 사람이기도 했다. 해진이 마지막으로 듣고 싶었던 말은 ‘잘 살아남았다’는 한마디였다.---p.201
최완우의 어깨에 올라앉은 해랑이 재촉하듯 정수리를 살짝 쳤다. 최완우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고, 고향에 여… 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식구라곤… 그 녀석뿐입니다. 지금은 당에서 보호해주니… 괜찮지만 훗날… 시집… 보내면… 작아도 집을 지어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 앞으로 나올 위로금도 한 번도… 신청하지 않고 있고….”
“지랄. 한 달에 겨우 몇 천 원 나오는 위로금을 모아서 뭐 한다고!”
“크, 큰돈입니다. 조금 더 모이면… 작은 집 정도는… 조, 조장님은 부유하게 자라셔서 그렇지만 인민들에겐… 큰돈입니다.”
해랑은 최완우의 순박한 생각에 잠시 짜증이 났다.
‘멍청아, 당에서 관리하는 위로금을 네가 가질 거 같으냐?’
“그, 그럼 조장께선 바람이… 있습니까?”
해랑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다시 최완우에게 물었다.
“네 동생 몇 살이냐?”
“네? 여, 열일곱 됐습니다.”
“에미나이 인물은 어때? 너랑 닮았어?”
“아, 아닙니다. 저랑 다르게… 작고… 곱습니다.”
“좋아, 그럼 내 소원은 네 동생을 부인 삼는 걸로 결정!”
“네, 네? 아, 안 됩니다. 그, 그건….”
“왜! 내가 뭐 어때서!”
---p.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