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침실로 가서 세례 때 받은 ‘기적의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느님, 부디 우리 아이가 행복해질 수 있게 해주세요. 아이의 행복을 위해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일러주세요.’
그러자 엄숙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생긴 모습이 다르다고 해서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된다.”
믿기 어렵겠지만, 목소리는 분명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이 저 아이를 사랑하시는구나. 사람들에게서는 사랑받지 못해도 하느님이 저 아이를 지켜주고 계셔.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요? 그 목소리를 듣고 내 마음은 기쁨에 넘쳤고, 서둘러 희아에게 달려갔습니다.
작고 여린 희아. 작은 몸에 작은 손. 두 개의 손가락으로 갈라진 그 작은 손이 힘차게 피어난 튤립처럼 예쁘고 앙증맞아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본 뒤로 내 마음은 두 번 다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 p.26, 1장 <내겐 선물 같은 희아> 중에서
손가락 힘을 기르는 것. 지능을 조금씩 계발해나가는 것.
이 두 가지를 당면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 조건에 맞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도달한 것이 바로 피아노였습니다.
피아노밖에 없어!
그 생각이 들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곧바로 희아를 데리고 근처 피아노 학원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학원 선생은 희아의 손가락을 보자마자 고개를 내저었습니다.
“따님 손가락으로는 피아노를 치는 게 무리입니다.”
몇 번을 부탁해도 희아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희아에게 피아노를 가르친다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운 일임을 깨달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앞으로 장기전이 되리라는 각오를 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당시 근무하던 산부인과 병원과 집 근처에 있는 피아노 학원이란 피아노 학원은 모조리 돌아다녔습니다.
--- p.87, 4장 <피아노와의 운명적 만남> 중에서
나는 희아가 <은파>를 완벽히 칠 때까지 예전보다 더 지독하게 연습을 시켰습니다.
<은파>를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그야말로 집에 있는 동안은 내내 되풀이해 들려주었습니다.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식사는 피아노 연습을 하면서 먹을 수 있는 찐 고구마 같은 것으로 해결했습니다. 유치원에 있는 동안과 이동 시간, 그리고 짧은 식사 시간과 수면 시간 말고는 모든 시간을 피아노 연습에 쏟아 부었습니다.
병원에서는 키보드로 집에서는 피아노로,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하루가 <은파>로 시작해 <은파>로 끝났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이지 살벌하기 짝이 없는 스파르타 교육이었습니다.
--- p.103, 5장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의 탄생> 중에서
유치부 수상자를 발표할 차례였습니다. 심사 결과가 좋을 거라는 선생님 말에 혹시나 하는 실낱같은 기대를 품고 기다렸지만 희아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습니다.
‘희아가 이런 무대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여느 아이들과 똑같이 무대에 서서 그 어려운 <은파>를 끝까지 연주한 희아가 대견스러웠습니다. 정말 잘했다고 오늘은 듬뿍 칭찬해주어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희아” 하고 호명하는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습니다.
무슨 일인지 그저 얼떨떨하기만 했습니다. 남편과 시댁 식구들이 환성을 질렀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허둥대던 나에게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선생님이 눈물을 글썽이며 축하 인사를 건넸습니다.
희아가 유치부 최우수상을 수상한 것입니다.
이윽고 사태가 파악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감동과 함께 눈물이 왈칵 솟구쳤습니다. 희아를 보았더니, 터질 듯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트로피를 가슴에 꼭 안고 있었습니다.
건반도 제대로 짚지 못하던 희아가 최우수상을 받다니……. 이 자리에 오기까지 그 길고 험난했던 여정이 뇌리를 스치고 지났습니다.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로서의 희아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 p.110, 5장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의 탄생> 중에서
최근에 희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복지가 잘 갖춰진 선진국보다는 사람들이 장애인에 대해 잘 모르는 나라에서 공연하는 게 더 보람 있는 일인 거 같아.”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낮은 나라일수록 자신의 공연이 더 큰 의의를 갖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예전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지만 한국 사회에도 장애인에 대한 차별의식은 여전히 뿌리깊이 남아 있습니다. 장애인 자녀를 집 안에만 가둬둔다는 어느 유명 대학의 교수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2007년 9월에는 여러 음악인들과 더불어 북한 장애인들을 돕기 위한 대규모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공연 수익금으로 휠체어 250대와 의약품 등을 구입에 북한에 보냈습니다.
앞으로도 희아가 장애인들과 그 가족들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을 전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입니다.
--- p.173, 7장 <엄마와 희아의 희망 이중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