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있는 날은 으레 점심 나절이 기울어질 만해서부터 바람결과 함께 물이 설레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수채가 되살아나고 뒤미쳐서 파란이 일기 시작하면, 물결마다 타는 듯이 이글대며 반짝이는 서슬에 누구도 저 먼저 실눈을 뜨지 않고는 물녘을 바라다 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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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으로 쓰인 나무는 나무이되 나무 같지 않은 나무이지요. 그렇다면 덩굴이냐, 덩굴도 아니지요. 풀 같기도 한데 풀도 아니고 그러나 숲을 이루는 데는 제 나름대로 역할을 하는 나무이지요. 꼭 소나무나 전나무, 낙엽송처럼 굵고 우뚝한 황장목 같은 근사한 나무만이 숲을 이루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 가치가 희미한, 그러나 자기 줏대와 고집은 뚜렷한 사람들의 이야깁니다. 돈 없고 힘 없는 일년살이들도 숲을 이루는 데는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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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방 뭔 소리여. 저수지 옆댕이루 왔다는 소문 듣구 대번에 알아본 사람버러. 앞으루 땜이 하나 더 생기면 그 물은 농업용수로만 쓰게 되니께 각종 위락시설이 쫙 들어슬껴. 앞으로 월마까장 뛸는지 암두 물르는 디니께 암말두 말구 몇 년만 더 붙잡구 있어. 거기 존 디여. 존 디루 잘 골랐다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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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연한 눈으로물 위의 달빛에 빠져 다링 이우는 줄도 모르고 있던 그는 갑자기 달빛에서 헤어나 물이 사방에서 금을 긋고 있는 기스락까지 물 위를 모조리 쓸어보았다. 없었다. 밤낮으로 늘 있던 것들이, 그리하여 지금 이 시간에도 반드시 그렇게들 있어야 마땅한 것들이 없었다. 어쩐지 처음부터 어디가 허전하고 어느 구석인가 굻은 듯한 느낌이 드문드문 묻어나서 거칫거리었던 장본도 바로 그것들이 보이지 않은 탓이었던 것을. 그는 그제서야 새삼스럽게 그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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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그러는 목적이 뭔데? 종구가 한마디로 잘라서 묻자 은산이도 한마디로 잘라서 대답하였다. 우선 두 가지만 얘기헐까. 하나는 이웃과의 공동체 적인 생활을 위해 나를 희생하자는 것. 내가 장인 영감더러 도로 포장 공사가 싸게 끝나서 이웃 사람들이 쾌적한 환경을 누리도록 길가의 산소를 빨리 옮겨 모시라구 이냥 자주 와서 말씀드리는 것두 다 그거 아닌감. 그러구 또하나, 유아르가 국회에서 비준을 못 받게끔 끝까지 투쟁하여 우리 농민들이 외국의 농민들한테서 주체적인 농권을 되찾게 하는 것. 그래서 너한테 돌아오는 게 뭐냐구? 그야... 말하자면 국가와 민족의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산다-, 뭐 대충 그런 수준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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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희망은 역시 자라나는 아이들뿐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꼈던 것이다. 그는 문득 꾸지뽕나무를 쳐다보았다. 까치 둥지가 어느 때보다도 잘 보였다. 만약 저마저두 없었더라면 이냥 오래 가는 가물에, 이냥 더디 가는 더위를 워치게 견딜 뻔했을겨. 전은 까치둥지를 바라보며 내 너를 보아서 가마, 하고 정한 다음 웃는 낯으로 일렀다.(중략)'시방버텀 열심히 허거라. 내년 봄이면 둥지 하나가 더 생길텐디, 그늠은 니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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