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여기에는 김대중 개인의 은밀한 소망도 작동하고 있는 듯하다. 말하자면 박정희=경제, 김대중=민주. 고로 두 사람은 한국 현대사의 두 기둥이라는 것이다. 김대중은 아마 후세 사람들이 자기를 이렇게 평가해주기를 원하는 모양이다. 그것은 과대망상이다. 경제를 발전시킨 것도 국민이고, 이 사회를 민주로 이끈 것도 국민이고, 이 사회를 믽로 이끈 것도 국민이다. 대중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 사실을 망각하면 곤란하다.
'박정희=경제'든, '김대중=민주'든 그 바탕에는 원시적 의인법이 깔려 있다. 말하자면 역사의 발전을 특출한 개인의 능력으로 설명하는 19세기적 영웅 사관이라는 미신이 동아시아 특유의 '인물론'으로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얘기가 담론의 자격을 얻어 사회에 통용된다는 것, 그것은 우리 사회 일각의 지적 전그대성의 증거다.
--- 202001/04/06 (sian)
전세계 영화인들의 저주와 전세계 영화팬들의 찬미를 먹고사는 20세기의 에덴 동산, 할리우드의 연례 재롱잔치. 오스카 수상식은 보는 사람의 오감을 사로잡는 마력이 있다. 그것은 그 자체로 모든 할리우드 장르 영화의 온갖 컨벤션들을 화사하게 배열한 최고급 종합선물이다. 오스카 수상식의 서너 시간 넘어 하기 때문에 털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는 버릇을 가진 나는 챙겨보지 않아도 해마다 보게 된다. 그리고 매번 쇼가 무르익을수록 볼거리가 쌓여갈수록 불편함도 같이 쌓여간다. 자본주의를 거부하기로 한 내가 자본주의의 꽃을 감상하고 있기 때문이며, 전세계 피압박 영화를 지지하기로 한 내가 가해 영화의 자축연에 참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 p.32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큰 미덕은 다양성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신과 다른 의견을 존중하며 여러 다른 의견간의 공정한 경쟁을 통해 최선의 사회적 합의를 얻는다. 그런 지리한 과정은 좌든 우든 좀더 '능률적인' 사회 시스템을 바라는 사람들에겐 답답함을 주지만, 개인의 개성과 사회 정의를 동시에 기대할 수 있는 분명한 방법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일보>는 자유민주주의의 적이다.
--- p.50
아이들은 자기 표현 욕구를 실현할 어떤 수단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문화적으로 세련될 대로 세련된 아이들을 만족시킬 커리큘럼을 학교가 개발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들은 과도하게 유행에 매달린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유난히 10대 패션에 민감한 듯한데, 그것은 아마도 '교복문화'로 대표되는 유교적, 가부장적, 군사문화적 억압과 일정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겉과 속이 다른 체면문화안에서 아이들은 '점잖음'에 짓눌려 '자기 표현'을 억압당해 왔고, 그러한 억압이 반대로 과도한 패션 집착을 불러온 것처럼 보인다.
--- p.93
모든 새로운 것이 다 그렇듯 아웃사이더 역시 몽상에서 출발했다. 올해 초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90년대 중반 이후 나타난 이른바 전추적인 글쓰기를 하는 지식인들이 힘을 모으는 잡지가 있으면 좋겠구나 그게 가능만 하다면 세상에 참 유익하겠구나 혼자 생각했던 게 아웃사이더의 시작이었다.
--- p.머릿말
당대를 파악하는 지식인의 노동은 용접을 하는 용접공의 노동이나 물고기를 잡는 어부의 노동처럼 사회적으로 분담된 하나의 역할일 뿐이다. 지식인의 노동이 원래부터 다른 모든 노동보다 존귀한 것은 아니다. 인간이 만든 것 가운데 원래부터 존귀한 것은 없다. 사회가 지식인에게 육체노동의 의무를 면해주고 존경과 명예를 준 것은 지식인이 원래 존귀해서가 아니라 당대를 파악하는 그들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지식인에게 등대의 역할, 이정표의 역할을 맡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기억하는 지식인은 그지 많지 않다. 지식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상한 삶과 세상의 존경과 명예가 제가 나면서부터 똑똑하고 잘나서 얻은 당연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들은 '지식인 세계'를 형성하고 그들끼리만 소통 가능한 암호 언어(그들이 '지적 대화'라 부르는)로 그들의 서푼짜리 허영심을 충족시킨다. 그들은 또한 그 서푼짜리 허영심의 냄새나는 퇴적물을 지성이니 교양이니 인문주으니 하는 이름으로 몸에 두른 채 당대 현실로부터 대중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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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벌써 <아웃사이더>를 가리켜 '2중대냐?'라는 소리가 나왔다. '2중대'라는 말에서는 내가 가장 혐오하는 선동의 냄새가 풍겨난다. 그렇지만 피하지 않고 그 말을 해체하겠다. 우리보고 2중대라면 <인물과 사상>이 1중대란 얘기일 것 같다. 다른 편집진의 반응은 아직 모르고 있지만,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그래요. 2중대요. 아니, 우리가 2중대라고 하면 <말>이 좀 서운해 할 것 같다. 2중대가 아니라 3중대요. 아니, 우리가 3중대라고 하면 <당대비평>이 좀 서운해 할 것 같다. 3중대가 아니라 4중대요. 아니, 우리가 4중대라고 하면 <딴지 일보>가 좀 서운해 할 것 같다. 4중대가 아니라 5중대요. 왜 그러오? 6중대,7중대를 꾸리고 싶소? 대환영이오. 과거의 전사는 택시운'전사'가 됐다가 이제 5중대의 '전사'가 된다. 아주 기쁜 마음으로..
--- p.182
10대 문화가 세상을 휩쓸고 있다. 10대 문화가 마이너리티였던 시대는 까마득한 옛일처럼 느껴진다. TV, 잡지, 영화, 패션, 할 것 없이 온통 10대가 문화주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제는 10대에 아부하지 않는 문화인들은 살아남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10대 문화는 더이상 비주류 문화가 아니다. 10대 문화는 10대의 빠른 피드백에 힘입어 점차로 문화 시장의 가장 막강한 공룡이 되어가고 있다. 20대만 해도 문화적으로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3.40대 이후 세대는 말할 것도 없다. 얼추 서태지의 등장으로 문화시장에 상장되기 시작한 10대 문화는 여러가지 특이한 현상들을 숨기고 있다.
--- p.89
<아웃사이더>의 목표는 번창이 아니라 쇠락이다. <아웃사이더>라는 잡지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그런 날이 오기를 <아웃사이더>는 진정 바란다. 그날까지 <아웃사이더>는 열심히 연대하고 기꺼이 싸울 것이다. 모든 아웃사이더를 위하여.
--- p.머리말 중에서
<아웃사이더>의 목표는 번창이 아니라 쇠락이다. <아웃사이더>라는 잡지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그런 날이 오기를 <아웃사이더>는 진정 바란다. 그날까지 <아웃사이더>는 열심히 연대하고 기꺼이 싸울 것이다. 모든 아웃사이더를 위하여.
--- p.머리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