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불문佛門에 들어와서 세 번 크게 놀란 것이 있다. 맨 처음은 내가 실성인失性人인 것을 알았을 때 놀라고, 그다음은 이 지구란 실성인의 집단체임을 알게 되었을 때 놀라고, 세 번째는 전 인류가 모두 실성한 자신을 모르고 도리어 각자가 다 자기는 잘난 인간인 체, 무엇이나 다 아는 체하는 것이다. 그러나 행동을 하면서도 행동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아볼 생각을 못하는 데 더욱 크게 놀란 것이다.
---「어느 수도인의 회상」중에서
그러므로 부득이 어린 아이에게 사탕에 싼 쓴 약을 먹이는 것 같이 나와 남의 지난 날의 꿈, 곧 인정담人情談 속에 일체문제를 해결시키는 불설佛說[우주적 원리원칙]을 결부시킨 비빔밥 같은 글을 모아 엮어 발표하게 된 것이다.
---「어느 수도인의 회상」중에서
내가 나를 버려두고 남만 찾아 헤맸노라.
사람과 그 말소리 서로 못 봄 같아서야
뵐 모습 없사옵건만 기거起擧 자재自在하여라
---「어느 수도인의 회상」중에서
옛날에 어떤 무식한 할머니는 ‘즉심시불卽心是佛’이란 말을 오인하여 “집세기 불佛, 집세기 불” 하고 일심으로 부르다가 마침 내 일심화한 만능의 인간이 된 일도 있는 것이다.
---「어느 수도인의 회상」중에서
인생이 가장 귀하다는 것은 내가 내 생활을 하는 데 있는데, 이 세상 사람은 행동은 하면서도 행동하게 하는 나를 모르니 짐승이나 다름없이 식색食色에만 매달려 동물적 생활을 하는 것이다. 내가 못 쓰는 것은 내 것이 아닌데 내가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나는 내가 아닐 터이니 내가 나를 알기 위하여 내가 내 정신을 수습해가는 이 공부를 하여야겠다는 생각이 있는 사람으로서야 어찌 아니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느 수도인의 회상」중에서
나는 5대 독자 집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그리고 소녀 적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두 여의었다. 그야말로 외톨이였다. 게다가 이름마저 일엽一葉이다. 나중에 춘원春園 선생에게 받은 아호까지 일엽이 되었으니 “일엽, 일엽, 가냘픈 외잎사귀란 말이지” 하고 뇌까리게 된 이름이다. 우주적 외로움과 ‘센티’가 담뿍 실린 이름을 가진 존재였다.
---「청춘을 불사르고」중에서
자타의 합치인 ‘나’를 이룬 그때는, 위로 무서울 것도 없고 아래로 업신여길 것이 없음을 알게 되어 내 자유로 남의 구속을 풀어주고 남의 자유에 내가 동화되어 대구속에서도 대자유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때에는 고락과 행불행이 다 내 정신작용임을 알게 되어 천당에서는 살 만하고 지옥에서는 못 견디겠다는 몸부림도 그쳐지고 내 자유가 필요함을 알게 됩니다. 그때는 남의 권력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나는 새라도 나와 합의가 안 되면 허공을 벨 만한 날쌘 칼이 있어도 그 날아가는 방향을 막지 못할 것을 알아, 남을 믿게 할지언정 강요하지는 않게 됩니다.
---「청춘을 불사르고」중에서
불완전한 인간을 완전화시키는 법이므로 완전한 인간이 되려면 소인간인 이 몸과 혼을 다 살라버려야 하는데 다 살라 버리려면 우선 인정과 욕심과 책임과 미련을 다 버리고 사전 일을 위하여 입산수도하는 것이 제일 첩경이라는 것을 알았다.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중에서
남의 행복을 위하면 현재 내 행복을 위함보다 그 이자가 붙어서 더 길고 많은 행복을 누리게 된다.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중에서
위에서 거듭 말했지만 오직 한 길의 해결법이 있는 것이다. 그 길은 먼저 내 생명이 어떤 것인지 알아볼 생각이 나야 하는 것이다. 내 생명은 무한대의 힘을 가졌으므로 생사와 고락에 따 라 결코 헤매게 되지 않는 것이다.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중에서
느낌은 자체가 없으므로 내가 느끼지만 않으면 느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느낌만 없으면 고통도 쾌감도 다 없어지는데 생사가 있을 리 없는 것이다. 느낌의 신축伸縮을 자유로 하게 되면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중에서
세상에는 나를 찾는 법을 가르쳐 주는 선생도 없고 장소도 없고 다만 불교 안에 있는 선방에서만 나를 찾는 유일한 정로를 가르쳐준다. 참선법이 곧 도를 닦는 것인데 누구나 도를 닦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 도는 곧 나의 전체적 정신이라 전체적 정신을 수습하여야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정신을 수습해가는 공부를 한다는 뜻이다.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중에서
‘김일엽 평전’ 형식의 이 책은 그녀의 삶에서 일어난 각각의 사건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사건과 사건의 배경에 있는 사상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들에도 역시 중점을 두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김일엽에 ‘대한’ 책인 동시에, 독자가 김일엽과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하는 실험적 글쓰기이기도 하다.
---「김일엽, 한 여성의 실존적 삶과 불교철학」중에서
일엽이 사회운동가이자 지식인에서 종교 사상가이자 수행자로 삶의 방향을 바꾸었을 때, 사상의 주요 관심사도 역시 변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신여성으로 활동했을 때 그녀는 삶의 사회적 차원에 관심을 집중했다. 종교 수행자의 길을 걸으면서, 그녀는 존재의 의미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일엽의 생각은 존재의 실존적 현실 속으로 깊이 파고들면서, 세상 모든 존재 속에 두루 스며 있는 생명력에 초점을 맞췄다.
---「김일엽, 한 여성의 실존적 삶과 불교철학」중에서
일엽에게 텍스트는 자기 자신의 삶의 이야기였다. 일엽이 쓴 세 권의 책을 모두 지배하는 형식인 ‘스토리텔링storytelling’ 혹은 ‘이야기하기’는, 철학이 우리 일상의 경험에 내재된 것임을 입증하는 그녀 나름의 방식이었다. 세 권의 책 속에 담긴 자전적인 글쓰기는 일엽이 자기 존재의 의미를 추구하고 전달하는 독특한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살아가면서 일어난 일들을 그 일이 일어난 맥락으로 되돌려서 인간화하려는 시도이다. 자서전적 글쓰기는, 삶에서 사건이 일어난 당시에는 당사자도 분명히 그 의미를 알지 못했을 이야기를 사건의 맥락으로 되돌려줌으로써 당사자가 철학적 사유를 통해 자기 삶과 만나도록 한다.
---「김일엽, 한 여성의 실존적 삶과 불교철학」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