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나는 무엇에 심쿵하는가 하면, 남자가 내 종지에 간장이나 소스나 양념장을 부어줄 때다. 다 같이 한잔할 때 남자가 자기 종지에 간장을 붓는 김에 팔을 쑥 뻗어 건너편이나 옆에 앉은 내 종지에도 부어주는 그 행동에 심쿵하지만, 이건 작가와 편집자 두 분의 찬동을 얻지 못했다. ‘뭐어~ 간자앙~?’
--- p.20
서른여섯 살이 된 뒤로 화장을 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화장을 하지 않았던 것에 강경한 의사나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딱히 외출할 일 없는 일상(나간다면 헬스장이나 근처 술집)이고, 대체로 나는 몸치장에 관해서는 질릴 정도로 게으름뱅이다. 가능하면 목욕도 안 하고 싶을 정도다. 그래도 재작년쯤 가장 친한 친구 E의 말에 크게 납득했다.
E가 말하기를 “이 나이가 되어서 화장을 안 한다는 건 어떤 확고한 의사표명이나 다름없어. 본인한테 그런 의도가 없더라도 주위에서는 그렇게 본다니까”.
--- p.51
나는 이제 이십대가 아니라고 그때 새삼 생각했다. 예전의 나는 좋아하는 것만 하고 싶다고 오만하게 떠들어댔고, 실제로 싫은 것은 신중하게 피하고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만 주워 모아 자랑스레 놀면서 지냈다. 이십대의 인간에게 그것은 가능하기도 하고 특권이기도 하다.
하지만 삼십대가 되면 역시 그것만으로는 지낼 수 없다. 즐겁다, 즐겁지 않다, 혹은 멋있다, 꼴사납다를 초월한 곳에서 뭐가 뭔지 모르는 채 정체불명의 것에 휩쓸려 매일을 보내기도 한다. 꼴사나운 ‘몽롱’ 상태인 나는 그분의 말에 더없이 구원받은 느낌이었다.
인간이란 즐거운 일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힘주지도 않고심각한 척도 않고, 가볍게 말한 작가의 말은 그 뒤 며칠이나 지난 지금도 꼴사나운 어른이 된 내 귀에 달라붙어 있다.
--- p.87~88
되돌아가지 못하니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뭔가 굉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흔이 되어도 마흔다섯이 되어도 나는해수욕을 하러 오겠지만, 그때마다 보이는 것도 느끼는 마음도 달라지겠지. 그것은 추측할 수 없다. 일방통행의 길 저 멀리에 있으니까.
그것은 슬픔과도 외로움과도 다른,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뒤를 돌아보는 것도 아니고 앞쪽을 응시하는 것도 아닌, 지금 통과하는 사물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가장 맞는 일이겠지. 그러니 여름의 젊은이들은 헌팅이나 연인 쟁탈이나 사랑에 어리석을 정도로 열중해야 한다. 두 번 다시 그 지점으로는 되돌아가지 못하니까.
--- p.139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친한 사람, 좋아한다고 여길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야말로 사교성 인사가 존재해야 한다고. 사교성 인사의 수준이 현저히 떨어지는 나는 지인이나 친구가 쓰는 낯설고도 아름다운 사교성 인사를 열심히 기억하고는 한다. 그 말들은 확실히 나를 구해주고 격려해주며, 그뿐만 아니라 나 또한 언젠가 누군가를 구해주고 격려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 p.158~159
이때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힘껏 웃음을 참았다. 이제부터 굉장히 심각하게 나쁜 이야기를 혼자서 들을 참인데, 울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노인과 간호사의 대화가 너무도 우스워서 콜라 거품처럼 웃음이 보글보글 샘솟는 것이었다. 그 웃음의 거품은 그때 나에게 희망 그 자체였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희망.
이때도 나는 생각했다. 사람의 대화란 정말로 바보 같아. 바보 같고 의미도 없고 시시하고 중요한 건 언제나 전해지지 않고, 하지만 너무 따뜻해. 그렇게 생각했다
--- p.178
그런데 요즘 들어 맛있는 것, 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게 되었다.
“드시고 싶은 것 있나요?”라는 질문에 “맛있는 거라면 뭐든지요” 하고 대답하는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기도 한다. 편식이 고쳐진 덕분이기도 하고, 예전처럼 폭음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줌마 나이가 된 탓도 있다. 어쨌거나 대량의 술을 마시기보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
맛있는 것이 좋아지면 맛있는 것에 밝은 사람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된다. 그런 사람이 내 주위에 몇 명 있는데 나는 그들을 ‘미식복지부 장관’이라고 남몰래 부른다. 미식복지부 장관은 그저 평범하게 ‘맛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미식가와도 좀 다른 것 같다.
--- p.206
이제껏 관계없었고 앞으로도 관계없으리라 생각했던 동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의미 있는 곳이 된다. 찻집 위치나 패스트푸드점 위치, 교차로 이름 따위를 기억한다. 그런데 그 기억하는 방식이 어딘지 모르게 봄바람처럼 포근한 느낌이랄까, 내가 사는 동네를 기억하는 방식과는 조금 다르다.
--- p.245
그렇게 생각하면 사람에 대해서도 비슷한 느낌이 든다. 어떤 선입관도, 심리적 가감도 없이 정신적 벌거숭이 상태로 만나서 휘청거리거나 마음이 크게 흔들리고 싶다. 만약 백 살까지 산다 해도 마음이 제대로 흔들려준다면 좋겠다.
--- p.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