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당 과장과 밥을 먹다가 나는, “맨날 경복궁에 가면 궁궐 해설사들이, 무슨무슨 식 건물이며 몇 년도에 지어졌다가 일제에 의해서 파괴되었다는 식의, 궁궐 나오자마자 잊어먹을 이야기만 하고 있다. 세종이 16년여 간 집무하신 경복궁에서 세종 이야기를 듣고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 과장은 그 자리에서 “그럼 우리가 그것을 한번 해봅시다”라고 화답했다. (…) 비유하자면 《정조실록》이 대학원 수업처럼 빡빡한 내용에, 날 선 비판의 검(劍)들의 대결이 계속되는 내용이라면, 《세종실록》은 잘된 사전준비 속에서, 예측 못한 흥미로운 발견을 계속 해가는 문화재 답사 같은 것이었다.
《세종실록》 속 리더십 이야기는 그냥 훌륭한 인물들의 성공담이 아니었다. 숱한 장애물들을 ‘함께 의논해서’ 헤쳐 나가는, 우리 주위에서 실천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이야기였다. 특히 신분과 학벌과 문벌이라는 여러 어려움을 뚫고 마침내 소명을 이루어가는 숱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나를 감동시켰다. (…) 《세종실록》을 되읽으면서 내게 생긴 큰 변화는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좌절당했을 때 나도 모르게 《세종실록》 한 대목을 펴서 읽는 버릇이 생겼다는 점이다
---「머리말」중에서
선발제인(先發制人)이란 ‘먼저 일으키면 남을 제압할 수 있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뒤의 ‘후발제어인(後發制於人)’과 결합하여 일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제시된 인용문은 세종의 북방 영토경영 중 여진족 토벌 준비 중에 나온 말이다. 1437년(세종 19년) 6월 세종은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에게 “내 경이 아뢴 바를 매우 옳게 여겨, 여러 사람의 논의를 물리치고 행하고자 한다”라면서, 선제적으로 여진족을 토벌할 시기를 “잘 논의하여 아뢰라”라고 지시했다. 적에게 침략당한 뒤에 토벌할 게 아니라 먼저 기선을 제압할 기회를 찾아보라고 말했고, 석 달 후(1437년 9월) 이천은 여진족 토벌을 감행했다. 국가나 기업의 중요 사업을 성공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한곳에 모이게 하여 자유롭고 치열하게 토론하게 하라. 여기서 사업의 청사진을 잘 그려내게 한다. 둘째, 사업을 순차적으로 제시하여 전심전력을 기울이게 하되, 구성원들로 하여금 신뢰를 갖고 다음 사업을 기대하게 하라.
---「선발제인 先發制人」중에서
성심적솔(誠心迪率), 이 말은 리더십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세종어록이다. 지도자가 정성스런 마음으로 솔선수범하면, 백성들도 자기가 맡은 일[本]에 힘써 노력하면서 따를 것[趨]이라는 게 세종의 생각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세종이 이 권농교서에서 ‘밥 문제’의 획기적인 해결을 위해 마련한 《농사직설》 속 선진농업 기술의 전파 방법이다. “누구든 나와 함께 착한 정치를 같이 하려는 자들은 내가 위임한 뜻을 본받아서, 조종(祖宗)께서 백성에게 후하게 하셨던 전통을 준수(遵守)하고, 이전의 어진 사람들[前賢]들이 농사를 권과(勸課)한 규범을 보며, 널리 그 지방의 풍토에 마땅한 것을 널리 묻되, 농서를 참고하라. 시기에 앞서서 미리 조치하되 너무 이르게도 말고 너무 늦게도 하지 말라”는 말이 그것이다.
가까이는 대한민국 정치가 공효를 내지 못하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순조정권이 세도정치라는 ‘암흑기’로 평가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앞으로는 대통령부터 모든지도자들이 백성 이롭게 하는 후민지전(厚民之典)의 정치, 풍토소의(風土所宜)의 현장 경영, 그리고 변화와 혁신의 참이농서(參以農書)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소식을 자주 듣기를 소망한다.
---「성심적솔 誠心迪率」중에서
제나라 환공이 들에 나갔다가 망한 나라의 옛 성을 보고 어느 촌사람에게 물었다. “이곳은 누구의 땅인가?” 그 사람이 대답했다. “옛날 곽씨의 터입니다.” 제환공이 다시 “곽씨의 땅이 왜 폐허가 되었나”라고 묻자 그 촌사람이 “곽씨는 선을 좋게 여기고 악을 미워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제환공은 “선을 선으로 여기고, 악을 악으로 여기는 것은 잘한 일인데, 폐허가 된 까닭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촌사람이 대답했다. “선을 좋게 여겼어도 행하지 못했고, 악을 미워하면서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관중이 제환공에게 말했다. “임금께서도 또 한 명의 곽씨입니다.”
세종은 “하루가 늦어지면 10일이 늦어지고, 10일이 늦어지면 한 해가 늦어진다[一日之延 十日之延. 十日之延 一歲之延也]”고 했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듣고 뛰어난 생각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또 한 명의 곽씨’라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군역곽씨 君亦郭氏」중에서
세종이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적 성과를 거두고, 음악.문자.의약 등 거의 전 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거둔 배경에는 세종의 ‘인문전략’이 있었다. 인문전략이란 ‘인문학을 활용한 혁신전략’을 가리키는데, 세종의 경우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 하나는 지도층에게 경연(經筵)이라는 세미나식 어전회의에서 인문고전을 적극 활용하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백성들에게 시간이라는 고급 정보와 문자라는 소통 권력을 나누어준 것이다. ‘앙부일구’라는 오목해시계와 ‘자격루’라는 물시계를 전국에 배치해 백성들 누구나 시간을 스스로 알 수 있게 한 것이 전자(정보 보급)의 사례라면, 한글을 창제해 일상생활에서 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재판기록에서 억울함이 발생하지 않도록 한 것은 후자(문자권력)의 사례다.
국가나 기업이 지금보다 훨씬 높은 단계로 뛰어오르게 하려 한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른바 ‘퀀텀(Quantum) 점프’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세종의 인문학을 활용한 혁신전략(인문전략)을 추천하고 싶다. 그동안 많은 경영학자들은 효율성을 위한 아주 다양한 방법들을 제시해 왔다. 식스 시그마, SWOT 분석, 트리즈, 액션 러닝 등 수많은 혁신기법들이 그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질문, 즉 기존의 통념을 깨는 과감한 혁신 아이디어는 인문학적 사고에서 나올 수 있다. 인문학은 늘 인간 자체를 성찰하는 학문이며, 좀더 행복하게 사는 길을 고민해온 노력의 결집체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적 사고는 세종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원점에서 되돌아보게 한다.
---「맺는말」중에서
---「맺는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