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는 그저 그 사람이 그 순간에 누군가와 맺고 있는 관계이자, 선택할 수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삶의 형식 중 하나다.
연애 대상으로서 매력을 발산할 수 있는 것은 멋진 재능이지만, 그게 없다고 해서 내가 비참하거나 매력 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모든 인간이 연애에 최적화될 수는 없고, 세상의 관계는 연애 이외에도 무궁무진하니까!
아름다움은 확실히 취향을 탄다. 여기에는 누구나 공감한다. 그러나 못생김도 취향을 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단언컨대, 못생김에도 취향이 있다. --- p.27
어쨌든 서로의 껍데기에서부터 만남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싸우고 나서 화해하려고 다시 봤을 때 얼굴 때문에 화가 나면 안 되는” 마지노선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연애하지 않을지언정 제 기준에 못생긴 사람을 만나기 싫을 수 있다. 그 사람은 ‘눈을 낮춘 연애’보다 ‘취향을 고수하는 비연애’를 선택한 셈이니 내버려두길. --- p.30
어느 날 그런 내 모습이 ‘트루먼쇼’처럼 느껴졌고, ‘연애’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려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같은 행동을 처음인 양 반복하는 것에 흥미가 떨어졌다. 그때부터 나는 소개팅과 미팅 등을 중단했다. ‘파스타비우스’의 띠 바깥으로 튕겨져나온 것이다. 그렇게 연애를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그만두면서 평화로운 싱글 라이프가 시작됐다. --- p.32
이 “철벽녀”의 등장은 딱히 하자가 없는데도 비연애 상태인 사람에게 어떻게든 ‘이유’를 찾아내려는 욕구의 발현이다. 줄줄이 열거한 까다로운 조건이 그것을 입증한다. 철벽녀/철벽남은 객관적으로 그리 문제가 없음에도 연애를 하지 않기 때문에 연구 대상이 되고, 결국 연애에 대한 애티튜드(ㅋ)가 원인으로 지목당한다. 그리고 그들은 주제 파악을 못하고 현실을 잘 모르는 미숙한 존재, 누군가가 공들여서 그 마음의 문을 열어주어야 하는 구원과 계몽의 대상으로 구성된다. 철벽녀와 철벽남을 향한 조언과 조롱은 대충 다음과 같다. “누가 사귀재? 밥 한번 먹자는데 왜 먼저 나서서 오버야?” 철벽녀도 입이 있다. 말 좀 하자. “그 한번이 싫다고, 쫌!” --- p.48~49
나는 언제나 궁금했다. 도대체 왜, 언제나, 어디서나, 누군가에게나 ‘연애의 가능성이 있는’ ‘누군가에게 매력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여지를 남기도록’ 노력해야 하는가? 이것은 뷰티 프로그램이나 패션 사이트에서 툭하면 “남자들이 좋아하는 메이크업” “여친 생기는 옷”만 주구장창 반복하는 것에 대한 불만과도 상통한다. “너, 그러고 다니면 남자가(여자가) 안 좋아해.” 아니, 내가 뭐 걔들이 좋아하라고 태어났나? 여러분, 세상은 온니(only) 연애로만 가득 차 있지 않아요. 사람이 늘 연애에 최적화된 상태로만 살순 없어요. 그리고 연애에 적극적이지 않은 태도가 왜 콧대가 높고 주제 파악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며, 동의하지 않는다. --- p.49
쉬지 않고 연애하는 이들은 능력자가 되고,
쉬지 않고 공감 공동체와의 관계에 몰두하는 이들은
무능하고 눈치 없는 이로 몰아가는 데 동의할 수 없다. --- p.57
만족할 만한 공감 공동체를 가져본 이들은 안다. 무용한 이야기를 할 때 마음 놓고 진지해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흡족스러운지, 두세 번 에두른 농담에도 어떤 설명 없이 동시에 웃음이 터질 때 그 농담은 몇 배로 웃긴지, 몹시 시시한 일에 열을 올리며 몰두할 때 공감 공동체에만 거리낌 없이 공개하면 얼마나 속 시원한지. 사실 공감은 나의 괜찮은 부분, 사랑받아 마땅한 부분을 인정받을 때보다 하찮음을 전시하고도 수치스럽지 않을 때 발생한다. 괜히 떠먹는 요구르트의 뚜껑을 핥아먹는 데서 사람들이 영혼의 반쪽을 찾은 양 전율하겠냐며! --- p.아니다.)
그러나 모두가 이렇게 목을 매는 연애는 사실 근대적 개념으로, 발명되고 학습된 것이다. 이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하는 자연적인 감정으로서의 사랑과 연애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근대 이전의 동아시아에는 연애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선교사 메드허스트가 『영화사전』이라는 책을 펴낼 때 사랑--- p.love)을 연애라고 번역했다는 말이 있고, 또 혹자는 1870년경 나카무라 마사나오가 ‘love’를 연애라고 번역한 것이 첫 용례라고 말하기도 한다. 1890년을 전후로 일본에서 일반화된 이 단어는 1912년 조중환이 『쌍옥루』라는 일본 번역 소설에서 사용하면서 한국에 수입되었다. 식민지 조선은 대부분의 서구 개념이나 근대 문물을 일본을 거쳐 받아들였는데, ‘연애’ 역시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 --- p.61
‘연애하지 않을 자유’는 연애의 자격을 다 갖춘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연애의 자격이 확보된 사람이 연애하지 않을 리가 없다는 생각, 즉 ‘연애=좋은 것’ ‘할 수 있으면 안 할 리가 없는 것’ ‘할 수 있으면 반드시 해야 하는 것’ ‘연애를 안 하는 유일한 방법은 못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연애는 발명되고 학습된 것으로서, 한국에서의 역사는 겨우 100년 남짓 되었고, 절대적이거나 운명적인 것이 아니다. 연애는 때로는 자본주의와 공모하고, 때로는 자아 발견 욕구와 만나고, 때로는 국가 통치 정책과 공명하기도 하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개념이다. (저출산 대책이랍시고 남녀 집단 미팅을 제시하는 사례를 보면, 이를 노골적으로 알 수 있다.)
호감의 종류는 여러 가지다. 그것이 반드시 연애 감정이라는 확신은 어디서 오는 걸까? 자기가 그만큼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뇌가 핑크색인 건지, 왜 무슨 낌새라도 잡으면 연애와 연결하지 못해서 안달. 아오, 피곤하다, 증말. --- p.77~78
연애든 우정이든 결국은 관계의 문제다. 어느 하나를 불변의,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는, 바람직한 이상으로 규정한다면 우리의 삶은 너무 협소하고 빈곤할 것이다. 세상에는 별처럼 많은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한 관계와 우정과 연애가 있다. 누가 무엇을 선택하고, 그 선택으로 자신의 삶을 어떻게 꾸려갈지는 그 사람의 자유다. 연애 대신 우정에 올인한다고 해서 불쌍한 것이 아니고, 우정 대신 연애에 올인한다고 멍청한 것이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가장 이상적인 밸런스야 ‘반반 무 많이’겠지만, 그게 말처럼 쉽냐며. 그저 자신에게 알맞은 온도를 찾아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헤매는 과정의 연속이지. --- p.104
누군가를 끄는 매력은 멋진 재능이다. 그러나 인기가 없다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니며, 좌절하거나 낙담할 필요도 없다. 사람마다 어필하는 대상이나 매력의 장르는 각양각색이기 때문이다. --- p.222
우리는 좀 더 엄격해질 필요가 있다. 어떤 성향으로 차별과 편견을 조장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최소한의 자각이 있다면, 나이에 대한 언급이나 강요를 삼가야 한다. 도대체 적절한 나이와 그에 맞는 행동은 누가 정했으며, 거기에 따르지 않는 것은 왜 문제인가? 그딴 것에 착취당하기에는 열성을 다해 좋아하는 감정은 너무나 귀하고 아깝다!
--- p.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