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분투’는 서구 언어로 번역하기가 무척 어렵다. 이것은 인간됨의 본질을 뜻한다. “유, 우 노분투”(Yu, u nobuntu, 이봐, 아무개가 우분투가 있어)라는 말은 최고의 찬사다. 관대하고 호의를 베풀며 친절하고 다정하고 남을 보살필 줄 알고 자비롭다는 뜻이다.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내 인간성은 당신의 인간성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삶은 여러 사람과 한데 묶여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사람이 된다”는 말도 같은 뜻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다. “나는 속하고 참여하고 나누기 때문에 인간이다”라고 해야 마땅하다. 우분투가 있는 사람은 열려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내고,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인격과 능력이 탁월한 사람 앞에서도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더 큰 전체에 속한 존재임을 아는 그에게는 온당한 자기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욕을 받거나 위축되거나, 고문이나 압제를 당하거나, 실제보다 못한 취급을 당할 때 그 자기 확신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조화, 친절함, 공동체는 모두 가치 있는 선이지만, 사회적 조화는 우리에게 숨뭄 보눔(summum bonum), 즉 최고선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추구해 온 이 선을 파괴하거나 훼손하는 모든 것을 역병처럼 피해야 한다. 분노, 적개심, 복수심, 심지어 치열한 경쟁을 통한 성공은 이 선을 좀먹는다. 용서는 그저 이타심만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가장 큰 유익이 된다. 상대방을 비인간화하려는 것은 틀림없이 나도 비인간화한다. 용서함으로써 우리는 회복할 힘을 얻고, 사람들을 비인간화하려는 모든 것을 이겨 내며 여전히 인간답게 살 수 있다. --- pp.41-42(용서를 향한 제3의 길)
그러나 응보의 정의 외에 또 다른 정의가 있다. 회복의 정의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아프리카 사법제도의 특징이었다. 회복의 정의의 주된 관심사는 징벌이나 처벌이 아니다. 우분투의 정신에 따른 불화의 치유, 불균형의 시정, 깨진 관계의 회복, 희생자와 범죄자 모두의 복권 추구이다. 범죄자도 자신이 상처 입힌 공동체에 재통합될 기회가 필요한 대상이라고 본 것이다. 범죄를 사람들에게 벌어진 일로, 그 결과를 관계의 파괴로 보는, 훨씬 더 인간적인 접근법이다. 따라서 정의, 즉 회복의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유와 용서, 화해를 위한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 p.68(어떤 정의를 택할 것인가?)
우리는 백인 동포들에게 인종 차별의 어리석음을 자주 지적했다. 그들이 당혹감을 느끼고 그 어리석은 짓을 그만두기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코가 큰 나는 피부색 대신 코의 크기를 기준으로 사람을 나누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치하에서처럼 대학은 백인들만 다닐 수 있다고 말하는 대신, 코가 큰 사람만 다닐 수 있게 하면 어떻겠는가? 학업 성적이 아니라 큰 코를 대학 입학 자격 조건으로 삼는 것이다. 그리고 코가 작은 불행한 사람이 코 큰 사람 전용 대학에 다니려면 작은코부 장관에게 허가를 얻어야 한다. 자, 이러면 상황이 어떻게 될까? 내가 강연장에서 이 이야기를 꺼내면 청중 대부분은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얘기에 데굴데굴 구르며 웃는다. 인종 차별이 이런 식으로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문제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슬프게도 절대 그렇지 않았다. --- pp.109-110(피해자 청문회)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세상의 중심에는 소외와 파괴, 분열과 적의, 부조화가 만들어 내는 끔찍한 원심력을 거스르려는 움직임이 있다. 하나님은 중심을 향한 움직임, 하나됨과 조화, 선함과 평화, 정의를 향한 구심력을 작동시키셨다. 이것은 장애물을 제거하는 과정이다. 예수님은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양팔을 쭉 펴신 것은 모든 사람, 모든 것을 우주적인 포옹으로 품으시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 모든 것이 그분께 속하게 될 것이다. 외부인은 없고 모두가 내부인, 모두가 한 무리가 된다. 이방인은 없고 모두가 한 가족, 하나님의 가족, 인간 가족의 일원이 된다. 유대인과 그리스인, 남자와 여자, 노예와 자유인의 구분은 더 이상 없다. 분리와 나눔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모든 차이는 근본적인 통일성 위에 서 있기에 오히려 풍부한 다양성을 이루는 데 필요한 긍정적인 요소가 된다. 우리는 모두 다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철저하게 자족적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완전히 자족적인 인간은 인간 이하의 존재일 따름이다.
--- pp.308-309(용서 없이는 참으로 미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