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세 번 머리맡의 등을 켜고, 이미 빽빽하게 글을 써 둔 백지의 여백에 굳이 선을 긋고, 무언가가 불러주는 글귀를 받아 옮겨 적었다. 닭이 홰치는 소리, 아랫집의 개 짖는 소리로 눈 뜬 아침. 서너 시간 잤을까. 몇 달을 툇마루에 내어둔 채 방치하여 민들레 홀씨며 송홧가루며 별별 먼지를 뒤집어쓴 앉은뱅이책상을 말끔히 닦아서 방으로 들인다.
글이 쓰이고 글을 쓰고 싶은 어디론가부터 글 줄기가 다 죽어가는 가문 샘을 적시듯 마중물이 되어 오고 있는 아침. 내가 행복해지는 몇 가지 ― 혼자 걷는 것, 꽃과 마주하고, 무슨 풀 뽑는 시늉이나마 호미를 들고 텃밭 아닌 꽃밭에 나앉고, 찻잎을 따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밥상을 차리고 차를 나누고, 아프고 외로운 이를 찾아 함께 하고, 그런 그런 사는 일, 내가 늘상 우선순위에 두고 좋아하고 즐기는 여러 일상의 일 중에도 버겁고도 복된 일, 삶과 사람의 진실 진정성을 글로 그려내는 일 ― 그 일이 이 아침에 간밤에 시작되고 있다.
--- 「글이 고픈 밤이었다」 중에서
친구들이 온다. 나보다 겨우 일 년 혹은 몇 달 먼저 태어난 올해로 육십갑자, 회갑연 맞이한 친구들. 몇 해만에 고향으로 봄나들이를 오는 혜영이, 미자, 미선이, 순점이, 정희. 나는 사나흘 뒷산 오르내리며 진달래 하마나 얼마나 피나 피었나 꽃송이 세었다.
양지녘 쑥은, 달래, 냉이는? 그러는 사이 뜨락의 키 큰 금목서 아래 꿈결처럼 원추리 싹도 돋았다. 삼월 열이레 엊그제는 첫 살구꽃 피고, 오늘 삼월 스무날 아침에는 뒤란의 대밭에서 휘파람새 소리도 들리었다. 아, 올해도 봄이 오고 이 봄에 우리가 살아 있는 것. 생각만으로도 눈물 난다. 친구들은 하룻밤 묵는 것만도 민폐라고 밥은 밖에서 사먹자 하였지만
‘야들아, 너거는 모리제? 니들 환갑상 생일상 한 끼 밥상 채리줄라꼬 솥뚜껑 운전 삼십삼 년에도 여직 프로살림꾼이 되지 못한 요량머리 없는 귀자가 열흘 보름내 궁리만으로도 이러저러 너거 맞이할 마음만으로도 이따만큼 설레는 거…. 걱정 붙들어 매거라. 돈 들이지도, 애쓰지도 않는다. 생일상, 환갑상 머 별 것가? 된장찌개에 냉이, 달래, 원추리 무침에 쑥비짐떡에 진달래 꽃부침, 거기다가 광도막걸리 한 사발이모 환상이지.
친구들아 고맙다. 마음 가는 데 시간이 가고 돈도 가는 것인데 이 바쁜 세상에 너거들이 돈보다 귀한 시간을 내고 마음을 내어서 고향으로 나에게로 와 준다니, 나도 기꺼이 즐겁게 마음을 내고 시간을 내어서 토방에 군불 지피고 한 끼 봄 밥상을 차리마. 그렇게 우리 만나자. 놀자.’
아, 내일이면 내 친구들이 온다!
--- 「봄 기다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