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질어질, 몸이 안 좋으니, 짜증 내면서 저녁 준비하는 아내. 내가 이래선 안 되지, 하면서 아내는 의도적으로 국면(局面) 전환을 시도한다. “여보, 내가 하나 물어볼게요. 당신은 인생을 뭐라고 생각하세요. 다섯 글자로 말해 보세요.”
남편은 잠시 생각하더니 모범 답 말하듯이 진지하게 대답한다. “참고 사는 것.” 다섯 글자다. 아내는 놀란다.
“어머나 정말 모범 답 정답이네… 인생은 사랑하면서 살아야 하니, 오래 참는 것이지요. 오래 참는 건 오랜 고통이래요. 그게 사랑이고.” 남편의 삶에 대한 태도에 한 번 더 경의를 표하면서 아내가 말한다. “내가 말해 볼까요. 인생은 ‘지지고 볶고.’ 어느 목사님이 그러셨어요. 처음엔 속된 표현같이 들렸는데, 생각할수록 맞는 말이어요.”
아내를 ‘지지고 볶아 본 적 없는 남편’은 잘 못 알아듣는다. 아내는 이런 짓궂은 말장난으로 순진한 남편 놀리면서 국면 전환 꾀하는가. 죄책감이 들다, 짜증 안 내려고 이런 말짓기놀이라도 하는 게 짜증 내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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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남자는 무조건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고 한다.
늙고 추해진 모습의 엄마는 연민은 가지만 대면하기는 싫은 아들들. 안 보는 데서는 울기도 하지만 정작 대면하면 짜증이 나는 늙은 엄마. 어떤 친지(86세)의 체험담이다.
“인천 사는 아들 내외가 반찬 해 갖고 온다는데 그만두라고 했어요. 코로나로 아들도 안 만난다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은 인천에서 여기까지 기름 값이 얼마요? 와서는 하루 종일 앉았다만 가요. 늙은 어머니가 뭐가 좋겠어요.”
그 아들은 꼭 쓸 말만 하시는 어머니가 어려워서, 말없이 앉았다가만 갈까? 허드렛말 많이 하는 나는 아들들이 더 안 좋아할 것. 그 친지는 말한다. “아들이 86세가 안 돼 봤는데, 나를 어떻게 알겠어. 모르는 거야.” 명언이다.
70대(여) 친지의 솔직한 말도 들었다. 그 친지는 교회에서 식사 담당인데, 90대(여) 노인들이 자꾸 말 건네면 대꾸하기 싫어서 피해진다고… 늙으면 입 꽉 다물고 침묵해야.
자녀들도 싫어하는 늙은이를 어느 남(타인)이 좋아하겠는가.
--- p.79
청계산 채소 가게에서 가을무 2단을 샀다.
한 단이 짚단만 하다. 전에 사다 담근 가을무 김치가 맛있어서 남편에게 부탁해서. 한 열흘 동안 가을무 뿌리, 이파리도 많이 자라서 담그려면 작은 김장. 대형 스테인리스, 플라스틱 통 3개 내다가 씻고 간하고, 3시간 이상 일한다.
남편은 야구 시합을 보고 있고… 기아와 두산 경기. 남편은 경기하는 투수, 타자들을 코치하고 있다. “저런, 저런! 치지 말라니까 치고, 삼진 아웃! 병살타다! ….”
야구인들 쉬울까. 최고 선수도 타율이 3할 정도, 10번 나와서 3번 치면 잘 치는 것. 못 친 7번을 감내하는 게 선수 실력이라고. 어느 선수는 못 치고도 씨익 웃고. ‘다음에 보자.’ 어느 선수는 방망이 던지고. 대개는 덤덤히 떠나가고. 선수들은 매 경기마다 열 번 치면 7번의 좌절, 절망을 이겨 내는 힘이 있어야 한다.
짚단 같은 가을무 김치 두 단 담그는데도 온 저녁, 밤 3~4시간을 일한다. 힘껏 일해야, 힘이 나는 인생.
--- p.95
광주(光州) 어느 독자 님(남, 79세, 아직 예수 안 믿음) 전화받고 내가 감격한다. 내 글을 ‘하늘에서 내려 줘서 쓰는 글 같아요’ 하는데 이분이 하나님을 믿는 것 같아 감격하고, 그 기쁨을 옆 사람에게 얼른 전하고 싶어서 급히 남편을 부른다.
그런데 이상하다. 내가 ‘여보! 여보!’ 황급히 부르니까, 첫마디가, “또 돈 내라고! 또 돈 내라고!” 한다.
“아니, 아아니, 지금 천국에서 잔치가 났다고요” 하고 지나갔지만, 두고두고 생각하게 하는 남편의 맨 첫마디다.
‘여보! 여보!’ 하니까, ‘또 돈 내라고! 또 돈 내라고!’ 하는 대답은 우리 부부를 한마디로 말해 준다. 남편에게 나, 라는 아내는 돈 달라고 급할 때만 부르는 사람… 나는 반성해야 할지 안 해야 할지 하다가 안 하기로 한다. 내가 돈을 내 일로 쓰는 게 아니라, 생명 돕고 살리는 일에 썼으니까(?).
난 떳떳하게 말한다. “…여보 나 때문에 당신 물꼬가 마른다면 하나님이 채워 주실 거예요. 그걸 믿어야 해요.
나는 쓰고 당신은 채우는 게 우리 부부의 삶이어요.”
--- p.99
집으로 오는 특급 열차 속에서 나는 결혼식 뒤의 요란한 행사를 하나 치르고 간다는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히고 눈을 붙였다. 그 얼굴을 안 보려고 나도 눈을 감았다… 그와 나, 우리들 신랑 신부는 숲실 할머니 댁으로 가고 있었다. 산 밑으로 깔린 꾸불꾸불한 신작로를 걸어가면서 얘기를 한다. 호젓한 산길이라 서로에게만 열중하면서 간다. 다리가 아프면 산으로 뛰어 올라가 산 냄새를 마신다. 두 사람이 걷는 산길에서 얘기는 더 제 목소리를 지녀 가고, 어느새 십 리도 더 되는 할머니네 집 앞의 큰 소나무가 보이는 걸 아쉬워할 것이다.
끝없는 얘기로 이어지는 산골의 밤이 지나면, 다음 날은 뒷산에 올라야지. 산나무, 산새들, 산의 숨소리뿐인 깊숙한 자연 속에선 잃었던 이야기, 묻혀진 이야기도 살아날 것이다.
이야기, 이야기가 하고 싶고, 듣고 싶은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대화는 ‘영혼의 애무’가 아닌가. 원시의 숲속은 껍질을 벗은 그와 나의 심혼이 결합할 수 있는 은밀한 처소이다. 그 썰렁하고 시끄러운 호텔 방, 거긴 몸이 만나는 곳이지 마음이 만나는 곳은 아니다.
나는 눈을 떴다. 그는 아직 자고 있다. 약간 수그린 코밑엔 코털 몇 개가 나와 있다. 산속에서라면 나는 내 흰 손수건으로 그의 콧물이라도 닦아 줄 수 있지만, 거기서라면 그런 행위가 자연스러울 것 같지만, 나는 다시 차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공허감이 싸아하게 가슴을 메어 왔다.
“내가 많이 잤나?” 그의 풀어진 목소리에 내 가슴은 하나도 떨리지 않았다. 신비는 사라졌다. 잡아서 만져지는 꿈은 없는 것이다. 그에게서 신비만을 취하려면 결혼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신비는 끝이 보여도 그와 내가 창조해야 할 새 생활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환멸도 소중한 비축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그에게 눈부시게 흰 손수건을 내밀었다.
--- p.163~164
그날 오후 눈바람이 몹시 부는데, 나는 길쑴한 무 하나를 씻어, 머리 부분을 반듯이 자른다. 남은 밑동에다 숟가락으로 샘 파듯 긁어 나가니 무즙이 생긴다. 그 무즙 속에다 대파 서너 뿌리를 넣고 잘라 낸 머리 부분으로 다시 덮어서 아궁이에 올린다. 무가 지글거리는 소리르 들으면서 나는 남편을 생각하고 있다.
‘이 바람 속에 어디를 헤매고 다닐까? 기침이 더치겠구나. 이거라도 마시면 좀 나을까?’
이때 부엌 들창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여보, 여보, 됐어!” 남편의 목소리였다.
“예!” 하고 내가 뛰어나갔다.
남편은 취직이 되었다고 했다. 그렇게도 소원하던 취직이― 서울시 중등 교사 채용 고시에, 몇백 대 일이었다는 그 어려운 시험에 합격이 된 것이다. 내 눈이 금방 젖어 들어갔다.
“당신 고생 많이 했지? …많이도 울고.”
나는 남편의 얼굴을 피하면서 고개만 가로저었다.
“왜 당신은 안 좋아?”
“조오와요….”
크기만 했지, 별로 생기가 없는 내 목소리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도 고대하던 남편의 취직이 되었는데… 알 수 없는 그늘 한 자락이 내 얼굴을 엎고 지나갔다.
“어디 아파? 왜 그래? ….”
나는 남편의 얼굴을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자, 그의 등에다 얼굴을 묻어 버렸다.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소중한 이 지금의 성(城)이,
가난하나 어쩐지 길들여진 것 같던, 꿈이 있던 성이 무너지는 것 같은 한 줄기 허전함이 밀려왔다.
‘좋으면서도… 왜 그럴까?’
나는 자신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이상하게도 성내(城內)가 한눈에 보였다.
--- p.171~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