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상담 치료에서나 토크쇼에서 더 이상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살던 시대의 빈 사회는 대단히 경직되어 있어서 성에 관계된 것은 모조리 심하게 억압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내가 사는 빈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대신 자기 자신의 잘못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자신의 죄보다 더 내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죄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방어 공격이 뚜렷하게 느껴지는데, 특히 파트너 치료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은 ‘무죄’라며 타인에게 죄를 떠넘기고 서로 충돌하는 데서 크게 두드러진다. 분명 잘못을 저질러놓고도, 이를 부인하려고 자신의 잘못을 왜곡하는 수치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이다. 들어가는 말_ 잘못이 없는 사람들 p.6
인간의 공동생활은 항상 주고받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즉 어떤 이가 우리에게 죄를 지으면 우리는 또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는다. 따라서 죄는 심리 치료의 주제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리고 죄를 죄책감 정도로 흐리게 만들어서도 안 된다.
왜 사람이 죄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는지는 쉽게 설명된다. 죄가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떨쳐내려 억압한 죄가 고통스러운 것이다. 억압한 죄는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원칙에 맞지 않음을 계속 일깨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에 자꾸만 무의식 안으로 밀어넣게 된다. 죄를 무의식으로 밀어넣고 나면 표면적으로는 다시금 고통스럽지 않고 죄도 없어진다. 이렇게 만들어놓은 매끈한 표면에 자칫 흠집이라도 생기면 그야말로 위태롭다. 1장 잘못을 인정하기가 그토록 어려운가_ 누구나 잘못을 저지른다 pp.21~22
‘양심의 가책’은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 생각해보니 나중에 그 행동이 부당하고, 해가 되고, 나쁘고, 한마디로 악한 행동이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양심의 가책은 심각한 질병이 아니다. 또 이 양심의 가책은 사과를 통해 세상에서 없애버릴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공동체 안에서 급소를 찌르는 한마디가 바로 “네가 지금 나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모순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이 마치 이미 무죄에 대한 뚜렷한 증거이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파트너의 공격적인 침해에 대한 명백한 증거처럼 이용된다. 1장 잘못을 인정하기가 그토록 어려운가_ 왜곡되는 양심의 가책 pp.51~52
부모는 항상 속죄양이 되는 데 더없이 적합한 존재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사람이 항상 잘못을 하니까 부모도 언젠가 틀림없이 뭔가 잘못을 했을 것이다. 둘째 부모에게는 손쉽게 죄책감이 들게 만들 수 있다. 왜냐하면 부모는 실제로 자식들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부모들이 실제로 더 좋은 부모가 되고 싶어 한다. 바로 그 때문에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것만 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 허약한 변명과 싸구려 반사작용(여기에는 항상 사디즘과 전적으로 마조히즘적인 부분도 공존한다)이 자신의 비참함에 대한 책임을 부모에게 떠밀어버리게 만든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심리 치료 현장에서 자식들의 심리 병리학적 증상에 대한 모든 잘못이 자신들에게 있다며 깊은 절망에 빠진 부모들을 만난다. 그리고 또 반대 경우로 40년 전에 부모가 태만했던 것이 원인이 되어 인간관계가 불가능하다고 확신하는 50세의 환자도 있다. 3장 피해자 숭배와 타인에게 죄 전가하기_ 손쉬운 책임전가 대상, 부모 pp.133~134
원한의 증상에는 반복해서 자꾸 떠오르는 기억 및 정신 건강에 지속적인 부정적 변화가 있다. 일상의 성취 및 일상적 임무와 과제 극복이 원한으로 인해 대체로 불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미하엘 콜하스는 날이 갈수록 오로지 빼앗긴 말 두 마리와 자신이 당한 부당함만 생각한다. 만일 콜하스가 성공적인 상인으로 머물렀다면 어깨를 한 번 으쓱하는 것으로 손실을 감수했을 것이다. 늘 이익을 볼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런데 당사자는 끊임없이 원한의 감정을 전면에 내세워 자신과 타인을 비난과 무기력의 감정으로 엮고, 자신과 타인에 대해 공격적인 환상을 가진다. 그러다가 도를 넘어 자살과 확장된 자살(다시 말해 자살과 살인)에 대한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콜하스는 복수의 행위를 하겠다고 결심한다. 좌절한 학생들이 학교에 가서 저지르는 수많은 살인 광란이 바로 그런 동기로 일어난다. 6장 원한인가 용서인가_ 원한과 분노 pp.231~232
고해는 인간의 정상적인 욕구다.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들 모두가 추행을 고백할 수 있고, 고백을 통해 죄를 갚고자 하는 동경을 내면 깊이 간직하고 있다. ‘추행’이라는 단어가 혼란스러운가 이 단어는 우리의 관계상황에서 가장 유익한 표현으로 ‘수치스러운 행위’가 되겠다. 즉 고통스러운 행위다. 그리고 우리의 징징거리는 배가 그 때문에 가장 깊은 무의식 속으로 억압해버리고 싶은 것이다. 만일 자기기만의 세력, 즉 완벽주의, 자기집착, 자기 과대평가, 나르시시즘, 자기공감, 애달픔, 감상벽, 자칭 피해자, 자기연민 등이 우세하면 가슴은 억압의 유혹에 굴복한다. 하지만 가슴이 배의 세력을 붙잡아둘 수 있으면 머리는 자유로워져서 자각의 길을 갈 수 있다. 적어도 잠시 동안, 배의 기제가 자기 합리화로 우세해져 문을 다시 닫을 때까지 말이다. 그러니 고해하려면 재빨리 하라. 인식하는 순간 한 걸음을 내디뎌라, 내디딘 걸음은 나중에는 되돌릴 수 없으니까.
--- 8장 잘못의 고백_ 고해의 욕구 pp.300~301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