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의 몇몇 국가가 어느 한 시점에 유럽통합을 흉내 내며 초국가적 파워가 있는 기구들을 창설하는 데 동의했지만, 이들이 결코 통합 과정에서 실질적인 지배권을 내놓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통합에 대한 라틴아메리카의 질문은 어떻게 그리고 왜 국가들이 온전히 주권을 양보하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왜 온전한 주권 양보 결정에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지배권을 잃지 않으려 하고 확보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Chapter 1, 33~34」중에서
1950년대에 통합 과정은(미국이 중미 지역의 반공산화 전략을 위해 대리인 성격의 ODECA를 통한) 위기 해결의 도구로 사용된 반면, 1980년대의 위기 해결 도구인 아리아스 평화 계획은 지역통합의 재활성화를 위한 매개체 역할을 했다. 조금 더 비교한다면, 1950년대의 외부적 간섭(과테말라 혁명을 저지한 미국)은 중미 스스로 역내 문제를 해결하는 집단적 노력을 방해했다. 그와는 반대로, 1980년대에 위기 해결의 내부적 노력(아리아스 평화 계획)은 중미가 스스로 계획을 함께 이행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전자의 외부적 위기 해결은 통합 과정을 비정치화하는 경향이 있고, 1960년대에 통합의 정치적 측면은 사라진 반면 상업적 통합은 성공적이었다.
---「Chapter 2, 103~104」중에서
파라과이의 4월 위기는 MERCOSUR의 정치화를 한 단계 격상시켰다. 위기 발발 2개월 후, MERCOSUR 회원국의 대통령들은 1996년 6월 25일 ‘민주주의 약속에 관한 대통령 선언문’을 아르헨티나의 산루이스(San Luis)에서 서명하고 1998년 7월 24일 민주주의 약속에 관한 우수아이아(Ushuaia) 의정서에 조인했다. 이 의정서는 민주주의와 관련된 조항이 MERCOSUR 회원국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라틴아메리카 통합의 역사 가운데 하나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는 처음으로 하나의 정치체제 영역 내에 묶이게 되었다. MERCOSUR의 사례를 위시로 하여, 1990년대의 후반 이래 대륙 전체의 다른 국가 간 연합체에도 민주주의 항목이 확산되고 포함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Chapter 3, 129」중에서
통합의 범위가 확장되어 감에 따라 새로운 제도들이 창출되었지만 전반적으로 통합 프로젝트는 어려운 시기에 직면했다. 1971년 볼리비아 우고 반세르(Hugo Banzer) 장군에 의해 발생한 군부 쿠데타, 그 뒤를 이어 1973년에는 피노체트가 이끈 칠레 쿠데타 등으로 역내 정치적 분열이 심화되었다. 1976년 칠레는 안데스 협약에서 탈퇴할 것을 결심하고 “시카고 보이스(Chicago Boys)”라는 통화주의 개념을 지지하며 새로운 길로 나섰다. 그 후 1980년대 채무 위기가 저개발 국가에 들이닥쳤다. 채무 불이행 국가들 가운데 가령 볼리비아는 1985년 해외 원조에 치중하여 매우 심각한 수준의 국가조정 정책의 시행을 강요받았다. 같은 시기에 페루는 조금 비주류적 해결책을 시도했다. 이 당시에 역내 차원의 거시경제적 일치와 역내 연대를 찾아볼 수 없었다.
---「Chapter 4, 145~146」중에서
중미의 통합 수준은 결코 평탄하지 못했다. 이슈에 따라 일부 국가는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한 가운데 코스타리카는 무임승차자다. 예를 들어 이 국가는 1987년 중미 의회에 서명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때까지의 예외는 1993년 테구시갈파 의정서와 이 의정서의 점진적·자발적인 방법론이 규칙이 되었다. 이 변화는 통합의 실용주의적 관점을 발전시키는 유인으로 작용했는데 개별 국가는 합법적으로 참여의 정도를 손익 계산을 통해 정할 수 있고 이는 궁극적으로 역내의 공동 이익 건설을 악화시켰다. 다시 말해, 영국 스타일의 손 떼기(opting out) 전략은 명백하게 국내 사적 이익 방어에 유익하고, 이는 통합 수준의 퇴보를 의미한다. 회원 국가 중 일부 제도는 멕시코 또는 도미니카공화국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가변 기하학(variable geometry)이 지역 정체성에 혼돈을 유발할 수 있다고 보았다.
---「Chapter 5, 176」중에서
2002년 브라질 카르도소 대통령과 아르헨티나 에두아르도 두알데(Eduardo Duhalde) 대통령은 수차례 회동을 통해 MERCOSUR 강화를 위한 공통 의견을 나눴다. 그해, 브라질 대선에서 차기 대통령이 된 룰라 후보자의 승전보는 미주 대륙 전체에 감지된 “좌경화”를 확인시켰다. 2003년 5월 아르헨티나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와 2004년 10월 우루과이의 타바레 바스케스(Tabare Vazquez)도 대선에서 승리해 좌경화를 촉진시켰다. 오우로 프레토 의정서 10주년과 함께 이러한 역내 정치 기류가 MERCOSUR 변화를 위한 기회의 장을 열었다.
---「Chapter 6, 209~210」중에서
MERCOSUR 출범 첫해에 여러 문서에 따르면 양국 간 수많은 기업체, 특히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간 기업체가 설립되는 경향을 보였다. 또 다른 자료에는 대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으로 진입하기 전에 MERCOSUR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전략적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다국적 기업들은 MERCOSUR 시장의 확대에 따라 신속히 대응해 나갔다. 대부분의 경우, 다국적 기업이 이 지역 개발의 최대 수혜자였다. 주요 경제적·정치적 행위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MERCOSUR 출범 초기의 이 같은 열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주개발은행의 라틴아메리카 통합연구소 BID-INTAL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1993년 아르헨티나 국민의 85%, 브라질 국민의 93%가 MERCOSUR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Chapter 7, 237」중에서
차베스는 특히 규모가 작고 가난한 국가에 굉장히 관대했다. 제5차 페트로카리브 정상회담[베네수엘라 마라카이보(Maracaibo), 2008.7.13]에서 차베스는 배럴당 100달러 이상의 석유 가격 중 18개 국가에 수입 석유의 단 40%의 가격만 지불하고, 차액은 25년의 거치 기간으로 오직 1%의 이자율로 상환하게 하는 금융 조건을 제시했다. 이러한 관대한 재분배 정책과 차베스의 연성 외교(soft diplomacy)를 정치적 음모로 보든 혹은 어떤 속내로 치부하든, 베네수엘라가 천연자원 부존을 지역 공공재로 전환하고자 한 것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물론, 이는 정확한 사실은 아니다. 차베스는 베네수엘라의 부를 고갈시키는 접근을 한 것이 아니고 베네수엘라의 석유가 공공재처럼 “비경합적(non-revival)이고 비배재적(non-excludable)”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전략은 에너지 통합 과정의 공급 측면을 재형성했다. 더욱이, 차베스는 다수가 생각하는 것과 반대인 통합 과정을 훨씬 덜 정치적인 다른 트랙으로 옮겨 놓았다.
---「Chapter 8, 267」중에서
역내 미국의 헤게모니에 대항하는 움직임을 이끌려는 차베스의 의지는 역사적 선례가 있다. 카를로스 로메로가 언급한 대로, 페트로 외교는 베네수엘라의 전통이다. 2000년, 차베스의 야심은 글로벌 행위자와 역내 중재자의 역할을 품은 브라질의 새로운 역할과 대조를 이룬다. 브라질 룰라 대통령은 대결 국면 조성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모든 미주 국가는 합의를 추구하고 다 함께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브라질은 자신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FTAA를 실패로 이끄는 데 일조한 바 있다. 그러나 룰라는 실용주의는 게임의 규칙이라고 언급하며, 국별 이익 수호는 지역 거버넌스와 호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Chapter 9, 302」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