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이 언젠데요?”
“다음 주 화요일이요. 위험한 수술은 아니라지만 혹시 몰라서 지정 헌혈자를 구해 놓기로 해서 연락했어요. 혹시 하루 일찍 와서 검사 좀 받아 줄래요? 하룻밤 유이랑 같이 자고 수술 끝나는 것도 지켜봤으면 좋겠는데.”
미국에선 드물지 않은 혈액형이지만, 한국에서 RH-O형 혈액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유이가 그래도 된대요? 그 애도 나를 만나고 싶대요?”
“지난번 마더스데이에 카드를 두 장 썼어요. 하나는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주고 싶다고. 한국 들어올 때 가져왔어요. 유이 손재주가 좋아서 봉투도 직접 만들고 그림도 그렸어요. 썩 잘 만들었어요. 검사는 아침 열한 시로 예약해 뒀어요. 지성대학병원으로 와서 이 번호로 전화 주세요. 같이 내려갈게요.”
“헬로우, 마미. 암 오케이. 씨 유 쑤운!”
휴대전화 너머 저편에서 싱그러운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알겠어요. 시간 맞춰 그리로 갈게요.”
“미안하고 고마워요.”
용건이 끝났지만 제시카는 먼저 전화를 끊지 못했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초과의 귀뺨이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일 년에 두세 번, 제시카는 초과의 이메일로 사진이나 아이가 그린 그림을 보내왔다. 아이가 글씨를 배우기 시작할 무렵엔 스케치북에 삐뚤빼뚤한 솜씨로 ‘정초과’라고 쓴 뒤 키스를 보내는 동영상이 전송되었다. 매년 초과의 생일엔 원피스나 크로스백, 메리제인구두가 같은 디자인을 착장한 유이의 사진이 소포로 왔다. 그러나 초과는 단 한 번도 답장이나 선물을 보내지 않았다. 그녀에게 유이는 화면 너머에서 열렬한 마음을 담아 바라볼 수는 있되, 감히 애정을 고백하거나 답삭 끌어안을 수 없는 2D 캐릭터와 같았다. 어쩌면 영원히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아이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초과를 기껍고도 당혹스러웠다.
“햄 세일합니다. 원 플러스 원, 한번 드셔 보세요.”
마트 종업원이 갓 구워낸 햄 한 조각을 녹말이쑤시개에 꽂아 초과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퍼뜩 시시때때로 찾아드는 현기증과 손발 저림이 빈혈 증상은 아닌지 의심했다. 누군가 중독이라고 단언해도 반박하지 못할 빈도의 알코올 섭취, 하루 한 갑에서 두 갑 사이를 오가는 흡연량, 그리고 저체중. 다른 날 같았으면 종업원이 주는 대로 받아먹었을 시식 기회였지만, 인스턴트식품이 몸에 이로울 리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줌마, 피 맑아지려면 뭐 먹어야 돼요?”
--- p.26~28
“가는 건 좋아. 좋다 그래. 근데, 무슨 수로 서울 가려고? 도로는 막혔고, 천지사방에 전염병 환자들이야. 당장 저 앞에만 해도 두 노인네가 서로 물어뜯고 있어. 자, 어떻게 갈 건데?”
초과가 마른세수를 하며 슴벅한 눈으로 근대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신이든 뭐든 상관없어, 마지막까지 룰 따윈 없애 주겠어.”
턱을 바짝 당긴 근대가 틱장애 없이 주절거렸다.
“뭐? 오빠 지금 뭐라 그랬어?”
초과가 미간을 좁히며 근대에게 다가섰다.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서 마도카 쨩이 한 말이야. 터미널에서 믿을 만한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어. 어떻게든 서울 올라갈 방법을 찾아서 돌아올게. 초희랑 엄마랑 너 버리지 않아. 생각해 둔 게 있다구. 믿어도 좋아.”
초과는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가 일본 애니메이션 제목일 거라 짐작하며 쓴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 역시 어떡해서든 서울로 가야 할 처지지만, 무작정 거리로 나설 생각은 없었다. 최소한의 무기와 이동 수단이 마련될 때까진 몸을 사릴 작정이었다. 그녀는 2D 세계의 미소녀들과의 약속이 목숨보다 더 중하다는 서른셋 철딱서니를 어떻게 말려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숙영과 초과가 앞다투어 콧방귀를 뀌는 사이 근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동작으로 자신의 낡은 운동화를 손에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다다다다, 계단을 내려가는 빠른 발소리와 함께 근대의 가래 돋우는 소리도 멀어졌다. 숙영이 맨발로 아들의 뒤를 따라나섰지만, 초과의 손에 붙잡혀 집 안으로 되돌아왔다.
“엄마, 놔 둬. 저래 봬도 누구한테 도움 바라는 사람 아니잖아.”
초과는 방금 자신이 한 말 역시 애니메이션 대사 같다고 생각하며 현관문을 걸어 잠갔다. 숙영이 아련한 눈길로 현관문을 바라보다, 돌연 몸을 돌려 싱크대로 뛰어갔다. 그러고는 부엌 벽에 걸어 놓은 쇠국자를 낚아채 베란다로 향했다.
“정근대, 너 이거라도 갖고 가. 응? 누가 덤빈다 싶으면 그걸로 대가리를 갈겨. 어설피 치면 안 치니만 못해! 엄마 말 알아들어?”
숙영이 입자 고운 어둠을 쇠국자로 휘휘 젓다 아들을 향해 던졌다. 백팩에서 헤드기어를 꺼내 쓴 근대가 한 손으로 척, 국자를 받아쥐었다. 몇 년 사이 가슴둘레보다 허리둘레가 굵어지긴 했지만, 중고생 시절 단거리 육상선수로 시도 대회를 휩쓸었던 운동신경이 아주 사라진 건 아니었다.
“엄마, 기다리고 있어요. 기적도 마법도 진짜 있으니까. 크허허어헙……. 정초과, 걱정 마. 덕후는 절대 죽지 않으니까. 왜냐하면, 우리한텐 다음 주에 나올 애니, 다음 분기에 출시될 신작이 기다리고있거든. 크흡큽…… 반드시 지켜야 할 가족과 외장하드가 있단 말이야.”
--- p.57-59
“근대엄마야! 내 말 똑띠 들으라. 니 다담 달에 계 순번인 거 알제? 죽으면 그거 내가 다 타 묵는 기다. 알긋나.”
숙영이 고개를 들어 친구를 일별했다.
“야, 내가 너 좋은 꼴 그냥 두고 볼 거 같냐. 고만 쫑알대고 창문이나 닫어. 기미 껴, 이것아!”
친구가 코를 훌쩍대며 숙영에게 휘적휘적 손을 흔들어 주었다. 숙영은 하나뿐인 헬멧을 초희에게 양보하고, 곧바로 천엽 같은 골목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요구르트 판매원으로, 화장품 외판원으로 운동화 수백 켤레를 해 먹은 길이었다. 그 넌덜머리 나는 길을 다시 달리고 있었다. 현정이네 피아노 학원, 학주네 정육점, 당최 애가 안 들어서 환갑이 되도록 새댁이라 불리던 형자언니네 반찬가게. 그 골목 여기저기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흉측한 몰골로 나타날 때면 숙영은 믿지도 않는 관세음보살을 찾았다. 산부인과가 있는 건물들은 모두 셔터가 내려졌거나 감염자들이 에워싼 상태였다. 길바닥에서 애를 낳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엄마, 우리 이제 어디로 가?”
숙영의 등에 붙어 매미처럼 울던 초희가 흐느끼며 물었다.
“우리 서울 가자. 늬 오빠랑 초과도 서울 간댔어. 너도 지성대학병원 가서 애기 낳고 싶댔잖아.”
“그럼 우리 그이는”
초희의 물음에 숙영은 입이 막혔다. 사위도 자식이라지만, 딸 없는 사위는 불 없는 화로나 다를 바 없었다.
“진 서방 해병대 나왔다면서. 엽렵한 사람이니 어떻게든 살아남겠지. 넌 니 걱정이나 해. 오토바이에 앉아 새끼 흘려보낼래?”
벼락같은 숙영의 일갈에 초희가 다시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길은 알구 가는 거야?”
“내가 인간 내비게이션이다, 이것아. 다른 건 몰라도 늬들이 다 나 닮아서 길눈 밝은 거야.”
어둑해져서야 오토바이는 윤슬공원 앞을 지나고 있었다. 어둠이내린 공원에서 콩 볶듯 총소리가 들렸지만, 모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 p.160-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