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들이 내 수업을 통해 배운 신학자들의 이름과 이론은 잊어버리더라도 그 하루 동안의 낯선 공간과 낯선 시간을 통해 만져본 ‘날것’의 기억들?나뭇잎의 초록들과, 노숙인의 한쪽 손과, 어머니의 눈과, 도움이 필요한 어린 동물들의 울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결국 그 날것의 기억들에 의미를 만드는 일, 그것들을 통해 사람이 사람다움을 잃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이 신학이라고 나는 믿는다.
--- pp.27~28
그런 의미에서 여성신학은 가톨릭 전통과 페미니즘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조율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가톨릭 여성신학은 교회의 역사에서 사라진 여성의 역사를 복원하고, 교회의 의사결정 구조에서 제거된 여성의 목소리를 살려내어, 반쪽짜리 전통으로 이제껏 유지해온 교회의 전통을 온전한 전통으로, 온전한 삶의 전승으로 재건하는 신학이다. 여성신학은 예수의 복음이 남녀 모두에게 선포된 해방의 복음이었으며, 남성들뿐 아니라 여성들의 삶과 신앙이 없이는 복음의 전승이 불가능했으리라, 그리고 앞으로도 불가능하리라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전통은 여성신학의 걸림돌이 아니라 비옥한 토양이며, 여성신학은 전통을 거부하는 이념이 아니라, 전통과 시대가 함께 호흡할 수 있도록 돕는 선물이다.
--- p.32
승자 독식의 경쟁 지상주의 사회에서 극심한 빈곤에 내몰려 결국 삶을 마감한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 암과 희귀병, 갈수록 불어가는 빚에 시달리다 결국 숨을 끊은 바로 얼마 전 수원 세 모녀 사건의 희생자들에게 자살이 과연 선택이었을까? […] 자살은 양극화와 분배 불평등 등을 근본적인 원인으로 하는 사회적 문제이며, 돌봄의 사각지대와 정신건강의 문제를 경시하는 풍조에서 발생하는 공중 보건의 문제이다. 교회는 선택지를 찾기 힘든 극단적인 상황에 몰린 이들과 스트레스와 우울증에 짓눌려 심각한 정신건강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 또 자살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실의와 비판에 빠져 있는 이들을 외면하지 말아달라는 하느님의 요청을 따른다. 이런 의미에서 자살을 “극단적 선택”이라는 말로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풍조도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자살을 선택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사망한 사람뿐 아니라 유가족에게도 낙인이 되며, 그들의 죽음을 방조한 사회적 책임 또한 간과하게 하기 때문이다.
--- pp.47~48
하느님에 대한 낭만적인 열정은 신앙의 동기가 될 수 있겠지만, 신앙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진정으로 예수를 알고 사랑하고 그이를 닮아 사는 삶은 의심과 실망과 무기력과 혼돈의 시간을 반드시 거쳐야 하며, 매순간 하느님을 향한 선택을 통해서만 가능한 평생의 여정이다. […] 낭만적인 사랑의 관념에 지배되어 있는 신앙공동체는 사랑하라는 말은 늘 주문처럼 읊지만 사랑에 관해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고, 아무것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그 안에 숨어 있는 권력과 폭력의 문제를 무시하고, 의지와 책임의식을 마비시키며, 단지 사랑하면 모든 것이 평화로우리라 가정하는 잘못된 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 유독 교회에서, 혹은 그리스도교 유사종교에서 성폭력, 아동 성폭력 사건이 많이 발생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잘못된 사랑이 넘치기 때문이다.
--- pp.52~53
‘내 주변엔 성소수자가 아무도 없어요, 티브이에서나 보지.’ 이런 말씀을 하시는 신자들을 아직도 가끔 본다. 마치 본인은 성소수자 청정구역에서 산다는 듯 자랑스러워하신다. 이런 분들 만나면 참 민망하다. 자랑스러워할 일이 아니라 부끄러워할 일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은연중에 성소수자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마구 발산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주변에 적지 않은 이들이 당신을 친구로 여기지 않고 있다는 뜻이라고, 자신들의 눈물을, 아픔을 서러움을, 모욕스럽고 억울한 경험들을, 그리고 또 사랑을, 기쁨을, 행복을 함께 나눌 이웃으로 당신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나 더 한숨이 나오는 것은 교회 전체가 바로 이런 분들처럼, 옆에 살되 이웃이 될 수 없는 집단으로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사람을 사랑할 때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우리에게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가르쳤다.
--- pp.71~72
신비경험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단단한 ‘나’의 껍질을 부수고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과 직접 만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 만남의 순간을 다 담아낼 언어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에, 신비주의는 가장 명확한 듯하지만 가장 설명하기 어렵고, 모든 이들이 겪을 수 있으나 모든 이들이 알아차리지는 못하며, 지극히 일상적이지만 또 일상을 전복시킬 수 있는, 세상의 논리로 보자면 모순적일 수밖에 없는 경험이다. […] 어린 시절, 그 밤, 그 순간에 나는 온전히 거기에 있었다. 보고 있는 것, 겪고 있는 것에 마음도 몸도 온전히 내어주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과 일치되어, 온전히 거기에 있었다. 나의 존재와 행동이 일치되었던 순간이다. […] 신비가들은 우리가 놓쳐버린 삶의 아주 작은 징후까지도 포착하여, 어린아이처럼 놀라워하고 두려워 떨기도 하면서 그것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기를, 그리고 그것을 신비라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들이다. 그리하여 힐데가르트 성인이 그랬듯, 그런 순간들을 통해 피조물의 애통한 탄식을 듣기도 하고, 하느님의 고귀한 광채를 발견하기도 한다.
--- pp.86~88
하느님의 기적은 어쩌면 느리고 조용하고 감지하기 힘들게 펼쳐진다. 하느님의 기적은 인간을 통해 표현되고 전달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곧 하느님의 언어다. 무력과 권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사람 마음의 변화, 생명을 향한 동경과 그리움, 그리하여 사람이 사람을 서로 의지하며 생명을 바라게 하는 힘이 바로 하느님의 기적이다. 가혹하고 처절한 절망 속에서 문득 다시 일어날 뜨거운 희망을 발견하게 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힘이다. 세상이 다 회색으로 변하고 생기라고는 감지할 수 없는 깊고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지며 살고 싶다는 열망이 생기면, 하느님이 당신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계시다는 신호다. 외롭게 지하철 투쟁을 이어가는 장애인들의 몸부림에서 인간의 존엄을 본다면, 일 년에 하루 광장에 나선 성소수자들의 사랑에 대한 염원이 내게 간절한 사랑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내 삶도 위태롭지만 청년실업자, 해고노동자들의 불안한 삶이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면, 망가져가고 있는 지구, 죽어가는 작은 생명의 신음을 들을 수 있다면, 하느님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계시다는 신호다. 생명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기적이며 그런 하느님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믿음이다.
--- pp.133~134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를 구유에 누인 마리아와 요셉의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제단에 장식되어 있는 구유 속 아기와 아기를 바라보는 젊은 부부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영원히 정지되어 있지만, 실은 무척 떨리고 분주한 새 아침을 맞았을 것이다. […] 밤새 뜬 눈으로 안절부절못했을 것이고, 마구간 동물들의 소리에 행여 아기가 깨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을 것이고, 낯선 곳에서 노숙인이나 다름없는 신세이니 산모의 젖이 마르지 않게 할 하루의 끼니 또한 걱정했을 것이다. 세상을 뒤바꿀 예언은 자기 목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힘없는 생명으로 태어나 젊은 부부의 손에 맡겨져, 이들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렸다. 그리고 그 예언이 자라나 사람들 앞에 서기까지, 부부는 성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불면의 밤들을 보냈을 것이다. 성탄은 연약한 아기로 오신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돌봄과 사랑이 필요한 숱한 일상, 다음 날들의 시작이다. 축제의 화려함은 지난하고 꾸준한 일상을 가려버리지만, 아기가 살아낼 날들은 축제가 아니라 일상이다. 아기의 운명도, 아기가 실현할 약속도 이제 그 일상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맡겨졌다.
--- pp.177~178
“종교는 사실 살아 있는 것입니다. 종교는 우리가 공언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선포하는 것도 아닙니다. 종교는 우리가 하는 것, 원하는 것, 추구하는 것, 꿈꾸는 것, 상상하는 것, 생각하는 것?이 모든 것?하루 스물네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종교는 단순히 이상적인 삶이 아니라 실제 사는 그대로의 삶입니다.” […] 벌레를 보고 펄쩍 뛰면 그것이 그 사람의 종교이고, 살아 있는 동물을 실험하면 그것이 그 사람의 종교이며, 악의적으로 남을 험담하고, 또 모르는 이들을 무례하게 대하고 공격하면 그것이 또 그 사람의 종교라고 그들은 이해했다. 어느 날 갑자기 총칼을 들고 찾아와 땅과 하늘과 물을 가르고 자기 것이라 우기며 협박하는 이상한 종교를 가진 정복자들 앞에서 원주민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자신들의 종교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긴 채, 유일하게 의지할 대상인 조상들에게 호소하며 살고자 몸부림치는 자신들의 삶, 종교를 말이다. 내게는 이 원주민들의 종교가 온몸으로 하느님을 드러내었던 예수님의 종교와 많이 닮아 있는 것같이 느껴진다.
--- pp.213~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