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게 바람이 있다면 미술사의 길에는 편년사로서 미술사,양식사로서 미술사,도상학으로서 미술사 이외에 인간학으로서 미술사가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연구자가 많이 나와 이런 작업을 나누어했으면 정말로 좋겠다. 부디 이 책이 우리나라 화인들의 인간적.예술적 노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우리의 옛그림을 온 국민이 사랑하고 자랑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 책을 펴내며
서양미술사에서도 서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17세기 프랑스 혁명 언저리부터이다. 그 이전의 회화에는 귀족과 귀부인 또는 성경과 신화 속의 인물이 주류였다. 르낭의 [농부]같은 그림인 나타날 때는 시민사회로의 길이 보이는 사회변동과 시민의식의 성숙이 조성된 이후였다. 그 점에서 공재의 [짚신 삼기]와 [나물캐기]는 조선사회에서 서민의 위치가 전과 다르게 주목되엇고, 또 그러한 시대 조류를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인 진보적 지성의 존재를 말해주는 역사적 증언이다. 이 점이 공재의 가장 두드러진 선구적 면모다.
--- p.96
문장게에는 삼품(三品)이 있는데 신품(神品), 법품(法品), 묘품(妙品)이 그것이다. 이것을 화가에 비유하면 연담은 신품에 가깝고, 허주는 법품에 가깝고, 공재는 묘품에 가깝다. 이것을 학문에 비유하자면 연담은 태어나면서 아는자, 공재는 배워서 아는 자, 허주는 노력해서 아는 자이다. 그거나 그것이 이루어지면 매한가지이다. 또 이것을 우리나라의 서예가에 비유해서 말하자면 연담은 양 봉래, 허주는 한 석봉, 공재는 안평대군 류에 속한다.
연담의 폐단은 거칠음에 있고, 허주의 폐단은 속됨에 있으며 공재의 폐단은 작음에 있다. 작은 것은 크게 할 수 있고, 거친 것은 정밀하게 할 수 있으나, 속된 것은 고칠 수가 없다. 연담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며, 공재는 배울 수는 있으나 이룰 수 없고, 허주는 배울 수 있고 또한 가능하다.
--- p.38
나는 겸재의 <금강전도>를 볼 때마다 위인의 크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된다. <금강전도>의 세부 묘사는 대단히 치밀하다. 흔히 선이 굵고 스케일이 큰 화가는 디테일을 가볍게 처리하는 것이 상례인 줄 알고 있지만, 대가의 작품은 그렇지 않았다. <금강전도>의 세부를 살펴보면 바위 생김새가 저마다 다른 표정을 갖고 있어서 비로봉, 중향성, 금강대, 향로봉, 월출봉, 혈망봉 등이 특징적으로 요약되어 있고,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심지어는 마하연 원통암까지 가람 배치를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무리 지어진 소나무의 배치와 유연한 미점법과 태점의 처리에는 리듬감조차 느껴진다. 게다가 겸재는 그만의 특출한 유머 감각도 잊지 않고 표현하여 향로봉 사자바위엔 여지없는 돌사자가 앉아 있고, 보덕굴은 바지랑대에 의지해 벼랑에 붙어 있으며, 법기봉 정상엔 앉아 있는 부처상이 그려져 있고, 마하연 묘길상의 부처 조각도 점경으로 삽입되어 있다. 그리하여 <금강전도>에는 어느 화가의 어느 작품도 따를 수 없는 세부의 멋과 맛이 풍부하여 우리를 오랫동안 그림 앞에 붙잡아놓는다. 참으로 거장의 솜씨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위대한 장편소설은 어느 쪽을 펼쳐 읽어보아도 재미있고, 위대한 건축은 외형 못지 않게 내부가 아름다우며, 위인의 삶은 선이 굵은 만큼 작은 일에도 따뜻한 마음씀이 있다는 것을 이 <금강전도>에서도 그대로 느끼게 된다. 겸재는 그림에 관한 한 그런 위인이었다.
--- p.258-259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예술에 대해서는 당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명성과 찬사와 존경의 예찬이 이어지고 있다. 겸재가 이룩한 예술 세계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진경산수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또 그것을 완성한 것이다. 그는 중국풍의 그림을 답습하던 종래 화가들의 관념산수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직접 사생하여 이를 감동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진경산수의 창시자가 되었고, 또 그것은 후대에 두고 두고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리하여 겸재의 진경산수는 줄곧 민족적 산수화풍으로 이해되고 한국적 산수화풍의 창시자로 평가되어 왔다,
진경산수의 사회적 배경은 조선 후기 숙종 · 영조 연간에 일어난 사회 · 문화 · 예술 전반의 사조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사상에서 실학의 대두, 문학에서 한글소설 · 판소리의 등장과 사설시조의 유행, 그림에서 현실을 소재로 담은 속화(俗畵)의 탄생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그 모두를 '리얼리즘시대'의 산물로 이해해왔으며, 그런 인식 틀은 지금도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근래 겸재의 진경산수를 다른 각도에서 보는 두 가지 견해가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하나는 최완수를 비롯한 이른바 '간송학파'들이 겸재의 진경산수를 율곡에서 완성된 조선 성리학이 노론의 정치적 이념으로 구현된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의 산물이라 주장한 것이고, 또 하나는 홍선표, 한정희, 고연희 등 홍익대 출신 중견 · 신진 학자들이 진경산수는 명나라 때의 <황산도(黃山圖)> 같은 실경산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학설은 겸재의 예술을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하는 데 나름대로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이 두 학설 모두 적지 않은 과장과 오해가 있었다.
---pp.186~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