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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는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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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는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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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8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656쪽 | 147*210*35mm
ISBN13 9791163026402
ISBN10 1163026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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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 비스듬히 비산한 피가 황금 권좌에 흩뿌려졌다.
반듯한 검의 궤적이 그려진 목 아래 장엄한 빛깔의 푸른 망토가 처참히 구겨졌다. 동시에 망토에 휘감긴 몸 또한 쿵 둔중한 소리와 함께 허물어져 내렸다. 만인의 위에서 지고하게 군림하던 왕의 허무한 끝이었다.
바닥을 뒹구는 몸보다 아주 조금 늦게 떨어진 머리에서 사슴뿔을 흉내 낸 황금관이 추락했다. 깡. 대리석 바닥에 부딪힌 그것은 가진 무게에 비해 너무나 가벼운 소리를 내더니 작은 원을 그리며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끝내 주인을 단번에 벤 극악무도한 침략자, 세다스 왕국을 불바다로 만든 비스티우스 제국의 황태제(皇太弟; 황위를 계승할 황제의 아우)이자 이번 전쟁의 총사령관 로샨 비스티우스의 발치에 툭 닿았다.
“네 이놈!”
왕이 생전 앉았던 권좌 바로 옆에 자리한 왕비가 머리채를 어지럽게 풀어 헤치며 피눈물을 쏟았다. 가녀린 몸에서 나오리라 상상이 되지 않는 괴성이 울음과 함께 침략자를 향했다.
중년의 왕비가 거의 평생을 함께한 남편의 피로 얼룩진 바닥에 발을 딛더니 품 안에서 화려한 단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여러 귀한 보석들로 장식된 작은 단검은 누군가를 해하기는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검집 안 숨겨진 날은 예상외로 왕비의 표정만큼이나 잘 벼려져 있었다.
고개를 꺾어 나뒹구는 왕의 머리를 한 번 더 본 왕비가 무모한 도전을 했다. 그녀는 단검을 양손에 쥔 채 남편의 피로 만들어진 웅덩이 위, 검을 든 침략자를 향해 돌진했다.
“내 아들들을 도륙하더니 이제 내 남편까지 죽이는구나. 내가 너만은 하데스 신께 데려가마!”
혼신을 다한 몸짓이 제법 날카로웠다. 그러나 그렇다 한들 평생 검이라고는 들어 보지 않았을, 평소에는 꽃이나 보석을 쥐었을 고귀한 여인이었다. 로샨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던 그의 기사들은 제 주인의 실력과 성미를 잘 알았기에 여인의 어설픈 공격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여인은 주인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기 전 남편의 피를 먹은 검에 똑같이 쓰러질 것이 뻔했다.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왕비의 단검이 성큼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침략자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로샨의 기사들은 왕비가 팔을 뻗기 직전에야 제 주군의 상태가 어딘가 이상함을 깨닫고 급박히 움직였다.
그들의 주인은 머리카락 색만큼이나 검디검은 망토 아래 길고 예리한 검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검 끝은 바닥을 향했고 손의 힘은 느슨히 풀려 있었다. 표정은 언뜻 보기에 평소와 다름없이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가까이서 그를 보필한 이들은 알 수 있었다.
주군께서 평소와 다르다고. 로샨 비스티우스의 붉은 눈은 알 수 없는 빛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죽어!”
왕비가 단검을 쥔 손을 높게 들어 올린 순간까지 침략자의 시선은 왕비를 비켜나 있었다. 그는 왕비의 뒤, 정확히는 제가 베어 죽인 왕이 앉았던 권좌 쪽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전하!”
녹스, 하이든과 더불어 전장에서 로샨을 보필하는 최측근 중 하나인 루데타 가문의 프레드릭이 그의 무기인 장창을 쭉 뻗었다. 루데타 가문의 상징인 환도상어 문양이 새겨진 창의 뾰족한 끝이 단숨에 왕비의 옆구리를 꿰뚫었다.
창이 날아가는 소리 뒤로 붉은 생명이 흘렀다. 기세 좋게 달려들던 왕비는 비명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채 남편과 마찬가지로 허물어졌다. 머리가 없는 왕의 옆에 쓰러진 왕비가 엎드려 누운 채 가까스로 목을 가누었다. 평생 살아온 나라를 짓밟고, 남편과 아들들을 모조리 죽인 원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푸른 눈에는 지독한 감정이 넘실거렸다.
“아악!”
프레드릭보다 한발 늦게 달려온, 로샨을 광신도처럼 따르는 녹스가 왕비를 당장에라도 쳐 죽일 듯 형형한 눈으로 내려다볼 때였다. 외마디 비명이 울리고 권좌의 뒤에서 작은 몸이 튀어나왔다.
“왕녀님!”
뒤늦게 늙은 여인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그러나 권좌 뒤에 숨어 있다 나온 젊은 여인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쓰러진 왕비를 향해 달렸다.
“어딜 감히!”
녹스가 검을 움켜쥔 손에 힘을 줬다. 여인이라 무시했던 왕비가 주군의 지척까지 오는 걸 본 뒤였다. 한 번은 몰랐으나 두 번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 여인의 얼굴을 본 순간 녹스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대며 손을 멈추고 말았다. 길게 물결치는 금발 사이 희게 떠오른 얼굴, 깊은 숲속 감춰진 연못 같은 푸른 눈동자. 실크로 만든 키톤을 다리에 휘감으며 달려오는 여인의 외관은 눈물과 비통함에 엉망이었음에도 조금도 바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본래 가진 처연한 아름다움이 그녀가 처한 비극으로 인해 더욱 돋보였다.
‘저 여인이 소문의 왕녀인가. 과연……. 이번 전쟁의 원인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녹스는 속으로 찬탄을 쏟아 냈다. 하지만 언제까지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 그는 입술을 꾹 물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주군 앞, 쓰러진 왕비에게 달려드는 왕녀를 막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녹스가 발걸음을 떼기도 전 먼저 움직인 이가 있었다. 피를 흘린 채 늘어진 왕비 앞에 가장 가까이 자리한 그의 주군 로샨이었다. 그는 팔을 슬며시 들어 수하들의 움직임을 멈춰 세웠다.
녹스를 비롯한 기사들의 시선이 그들의 주군을 향했다. 그러나 제게 모인 시선에도 로샨의 눈은 한참 전부터 고정한 상대에게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왕의 목에 검을 휘두른 순간부터 왕녀만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머니…….”
침략자의 우두머리 로샨의 제지에 왕녀는 아직 생명이 꺼지지 않은 어미의 몸을 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누가 보더라도 왕비에게 남은 시간은 수 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정신 좀 차려 보세요. 네? 어머니!”
왕녀의 절절한 울음에도 왕비는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올라오는 피거품이 이미 목을 완전히 메운 것 같았다. 꾸르륵. 소름 끼치는 소리가 몇 번이고 왕비의 입에서 났다.
“예, 예레…… 나. 가, 가여운 내…… 아가.”
여식의 이름조차 제대로 부르지 못함에도 왕비는 왕녀를 향해 계속 무어라 속삭였다. 왕녀는 뻐금거리는 어미의 입 모양을 읽었는지 고개를 강하게 내저으며 연신 싫다 외쳤다. 그 모습이 참으로 안타까워 로샨의 측근 중 이런 자리에서만큼은 냉철하기로 유명한 하이든마저 고개를 살짝 떨궜다.
“이대로 가시면 안 돼요! 저만 남는 건 싫어요. 제발…….”
왕녀의 처절한 애원에도 왕비는 결국 숨을 거뒀다. 아래로 힘없이 떨어진 고개와 손이 금세 푸르스름해져 갔다.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한 왕비의 얼굴에는 비통함과 남은 딸에 대한 걱정이 묻어났다.
왕녀는 고개를 저으며 왕비를 연신 흔들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죽은 자와 산 자의 차이는 극명하게 느껴졌다.
“아악!”
자신에게 닥친 비극을 받아들이지 못한 왕녀가 찢어질 듯 높은 비명을 지르다 오열하기 시작했다. 어미를 품에 안은 작은 몸이 비 맞은 어린 새처럼 파르르 떨렸다.
왕과 왕비를 죽음에 이르게 한 침략자는 그런 왕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왕녀가 왕비의 몸 위에 엎어져 몸을 들썩이자 팔을 뻗었다. 피가 묻은 금속 재질 장갑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왕녀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섬뜩했다.
죽은 어미 위에 쓰러져 있던 왕녀가 다가오는 그림자를 느끼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살짝 틀었다. 그리고 순간 왕녀의 새파란 눈과 침략자의 새빨간 눈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두 사람이 서로를 눈에 담기 무섭게 왕녀에게 변화가 생겼다. 맑은 하늘을 머금은 듯 청명한 색은 그대로였으나 죽은 이들이 그러하듯 동공은 딱딱하게 굳었으며 절망 속에서도 분명 자리한 생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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