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 글
함께 가야 멀리 갈 수 있다-역사에 남는 ‘철의 여인’을 기대하며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마치면서 1976년 가을 신문기자가 됐다.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강제 해직돼 언론 밖에서 지내야 했던 1980년 여름~1984년 봄의 공백을 빼고도 33년간 저널리스트의 길을 걸었다. 짧지 않은 세월에 박정희 시대의 종막, 전두환 총부리 정권의 대두, 국민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쟁취한 뒤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 탄생, 그리고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등장까지 언론인의 위치에서 지켜보았다.
대학생 때는 박정희 유신(維新)체제에 반대하는 데모로 최루탄 연기를 뒤집어썼다. 전두환 신군부의 부당한 언론검열에 반대하며 선배들 틈에서 자유언론 선언문을 낭독했다가 길거리로 쫓겨난 것은 아직 신참기자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4년 뒤 복직(復職)의 기회가 왔을 때는 기업에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망설임 없이 기자의 현장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독재에 반대하고 언론탄압에 저항했지만 대한민국을 거역한 적은 없다는 사실이다. 기자로서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대한민국 역사를 부정하는 세력을 줄기차게 비판해 왔다.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노무현 정부 1년차이던 2003년 동아일보 수석논설위원으로 ‘배인준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어느덧 10년을 헤아리는 짧지 않은 세월, 2주에 한 번씩 총 240여 편의 기명칼럼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저널리스트로서 행운이다. 2003년 8월 5일자 첫 ‘배인준 칼럼’ [대통령이 ‘코끼리를 춤추게 하라’를 읽었다면]에서는 노 대통령에게 편 가르기를 그만두고 ‘누가 뭐래도 마이웨이를 가겠다’는 고집을 버리라고 주문했다. 그리고 ‘코드’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국가경영의 길을 물으라고 권했다. 대다수 국민이 ‘대통령은 그래야 한다’고 공감하는 바를 평범하게 전한 것이었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노 대통령이 분열과 아집과 독선의 정치가 아닌, 통합과 경청과 포용의 정치를 폈더라면 대한민국 역사와 그 자신의 운명이 어땠을까?
2007년 4월까지 썼던 90여 편의 ‘배인준 칼럼’에 ‘대한민국 되찾기’라는 제목을 달아 펴낸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치, 그리고 이를 통한 국리민복의 증진, 국가안전의 확보, 이것은 세계의 일류 문명국들이 다 추구하는 가치요,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이다. 이는 되물릴 수 없는 국가체제요, 국민생존전략이다. 평화도, 통일도 이 같은 가치를 버리거나 양보하는 것이어선 안 된다. 국가 진로(進路)에 관한 어떤 논쟁도, 토론도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합의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나라의 정통성, 정체성, 꼭 지키고 발전시켜야 할 가치관을 되찾아야만 한다."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고독한 결단으로는 감당하기 벅찬 시대상황
이번에는 첫 칼럼집 출간 이후 6년간 쓴 150여 편 가운데 100여 편을 고르고 재구성해 ‘누가 미래 세력인가’라는 제목 아래 묶어 보았다. 무엇이 미래이고, 누가 미래 세력인가. 대한민국을 경제와 안보의 위험으로부터 지켜내고, 국가 영속의 기틀을 다져야 한다. 나라는 부강해야 하고, 국민은 자유롭고 행복하며 세계 속에서 당당할 수 있어야 한다. 안으로는 정치 경제 사회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야 하고, 밖으로는 글로벌 ‘경쟁과 협력’에 다 성공해야 한다. 대한민국과 5000만 국민을 이런 미래로 이끌 능력과 의지, 책임감과 희생정신이 있어야 비로소 미래 세력이다. 그 정점이 대통령이다.
이번 칼럼집의 시대적 배경은 노무현 정부 말기와 이명박 정부 5년, 그리고 박근혜 18대 대통령의 출발선까지다. 지난날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들은 대부분 화려하게 등장해 초라하게 퇴장했다. 국민이 대통령에게 너무 큰 기대와 요구를 하는 탓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지도자 스스로 져야할 책임이 가장 클 수밖에 없다.
전직 대통령들은 ‘버림의 지혜’를 행동으로 옮기는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큰 것을 얻었음에도 소아(小我)에 집착하는 권력 행태, 연고자부터 챙기는 소인배(小人輩) 체질, 그리고 만인지상(萬人之上)의 권력에 도취한 오만과 독선. 이런 것들이 여러 대통령의 적지 않은 업적까지 퇴색시켰다.
박근혜 18대 대통령은 선배 대통령들이 못했던 ‘자기 극복’에 성공해 본인의 희망대로 5년 뒤 축복받는 퇴장을 할 수 있을까. 대통령에 이르는 험난한 도정에서 숱한 난관을 헤쳐 나왔으니 ‘내가 옳다’는 생각을 가질 만도 하다. 그러나 혼자 언제나 옳은 사람은 없다. 18대 대통령은 이 점 좀 더 깊이 성찰했으면 싶다.
2012년 미국 아마존 10대 경영서 가운데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의 책 ‘저지먼트 콜즈(Judgment Calls)’가 들어 있다. 국내에선 ‘최선의 결정은 어떻게 내려지는가’로 번역 출판된 책이다. 이 시대 최고의 경영 구루로 꼽히는 토머스 대븐포드 등 저자들은 "아무리 뛰어난 지도자라도 가끔은 잘못된 결정을 내리며, 최악의 지도자들은 그런 결정을 자주 내린다. 답은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위대한 조직에 있다"고 강조했다. 저자들은 수많은 사례를 검증해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찾아냈다. "미래의 리더는 중요한 결정을 혼자 내리는 게 아니라 최선의 결정이 내려지도록 조직의 역량을 키우는 사람이다. 특출난 통찰력이나 지능을 갖추고 모든 판단을 혼자서 내리는 대신, 많은 사람의 집합적 판단, 새로운 도구들과 정보의 힘을 받아들이고 최대한 활용하는데 리더의 역할이 있다."
기업 경영이 그럴진대 국가 경영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아무리 큰 기업집단의 경영도 대한민국 국가경영의 어려움에 비할 바 못 될 것이다. 5000만 국민의 삶은 서로 다른 욕구와 갈등으로 뒤범벅이 돼 있다. 지난해 12월의 대선 민의(民意)는 51.6% 대 48%라는 팽팽한 지지와 반대로 양분됐다. 세계 8대 무역대국에 1인당 국민총소득(GNI) 2만3000달러를 이루었지만 경제는 언제 터질지 모를 ‘지뢰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일성 세습 왕조의 어린 3대는 핵과 미사일의 위험한 불장난을 멈추지 않고 있다. 대통령의 ‘고독한 결단’으로 국가와 국민을 안전과 행복으로 이끌기엔 벅찬 시대상황이다.
혼자 가면 빨리 갈 수도 있지만 함께 가야 멀리 갈 수 있다. 대통령이 국민과 함께 가려면 ‘나에게 맡기라’는 생각부터 버려야 할 것이다. 모두 7부로 나눈 이 책의 제1부를 ‘대통령의 길’에 관한 글들로 엮은 것은 언론인으로서 나름의 염려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대한민국 역사와 세계인의 뇌리에 ‘철의 여인’으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을 숨길 생각이 없다.
올해 1월 하순, 서울 광화문이 바라보이는 세종대로에 자리 잡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직접 경험하지 못한 역사를 박물관 소장품 기록물 영상 등을 통해 배우는 어린이가 적지 않았다. 이들을 지켜보면서 미래 세대가 만들 대한민국 역사에도 희망을 느꼈다. 정말 대한민국은 꿈처럼 기적을 이룬 나라다. 박물관을 찾은 어느 80대는 "소싯적엔 한 끼도 못 먹은 적이 많았고, 구두는커녕 짚신도 못 신고 맨발일 때가 많았는데..."라고 말했다. 노년 세대는 가난 이전에 나라를 잃고 이름을 잃고 성(姓)도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꿔 불리는 치욕을 견뎌야 했다. 망국의 세월, 광복과 진정한 건국, 동족을 겨눈 김일성의 남침과 전쟁 참화, 그러나 이를 딛고 나라를 번듯하게 세우기까지의 역사는 바로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자화상이다.
세계는 대한민국을 보며 경탄한다. 북한을 보면서는 개탄한다. 같은 민족이니 북한 주민이라고 태어날 때부터 열등할 리 없다. 일제 식민 치하에서 해방 될 때만 해도 한반도의 북쪽이 광공업 설비를 비롯해 훨씬 더 산업화돼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인공위성에서 내려다본 한반도는 어떤가. 남쪽은 낮에는 푸르고 밤에는 밝다. 북쪽은 낮에는 누렇고 밤에는 칠흑이다. 대한민국 국민 중에 배고픔보다 다이어트를 걱정하는 사람이 훨씬 많아진 1990년대, 북한 주민 수백만 명이 굶어 숨졌다. 결코 주민들의 탓이 아니다. 김일성 왕조집단은 민족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우리 대한민국은 눈부신 성공을 했지만 진정한 선진국의 길에는 들어서지 못했다.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부터 자신들의 이익이 걸린 문제에서는 법을 짓밟기 일쑤이고, 사회 곳곳에 떼법과 폭력이 여전하다. 대한민국 역사에 자부심을 갖기는커녕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고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는 세력까지 있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나라에는 국격(國格)이 있다. 먹고 사는 것, 남을 이기는 것을 뛰어넘는 국민의식의 격상이 절실하다. 책의 제2부 ‘미꾸라지 용 된 나라’는 대한민국의 양지와 음지에 관한 글들이다.
2012년 대선의 쟁점 가운데 5년 전에는 없었던 것이 ‘경제 민주화’다. 경제력 집중과 빈부 양극화에 불만을 느끼고 분노까지 하는 상당수 민심에 부합하는 이슈다. 실패한 사회주의를 무덤에서 꺼내 되살린다고 시장경제를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회주의야말로 분배권을 장악한 소수권력과 대다수 민중의 삶을 극단적으로 양극화시키는 체제이자 ‘땀 흘려 경제 하려는 동기’를 말살하는 체제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경제 민주화 요구에 대한 답은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답도 시장경제 안에서 나와야 한다. 이 책의 제3부 제목을 ‘역시 자유시장경제가 답이다’라고 한 이유다. 무주택 서민을 위한다는 정치적 명분 아래 다주택 보유자에게 세금을 과도하게 물리면 결국 무주택 서민이 고생한다. 더 좋은 전셋집을 더 싸게 구할 가능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정부가 세금 많이 거둬 그 돈으로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하는 것은 하지하책(下之下策)이다. 경제 민주화라는 미명 아래 대기업을 때린다고 서민의 아랫목이 따뜻해지는 것은 아니다. 진짜로 일자리를 만들고 서민을 도우려면 다시 경제성장에 발 벗고 나서야한다. 이념으로 국민을 편 가르고 규제로 기업의 투자를 발목 잡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세력들
이념 세력 가운데 ‘우리 진보 진영’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위선(僞善) 덩어리다. 칼럼을 통해 이들의 허구를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도전과 변화를 통한 대한민국의 진정한 진보를 가로막는 ‘좌파 기득권 수구(守舊)세력’에 불과하다. 책의 제4부는 이들에게 ‘진보의 견장을 떼라’는 주문을 담고 있다. 대한민국이 지켜내야 할 가치를 지키는 것, 이것이 보수(保守)라면 정권도 국민도 더 보수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국 정치를 ‘3류다.’ ‘최악이다.’ 이렇게만 말할 수는 없다. 이 나라 정치는 성숙한 수준의 선거 민주주의를 구현하기에 이르렀다. 정치의 파탄으로 인해 헌정이 중단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는 국민은 이제 없을 것이다. 진정한 건국,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만들기’를 완성하는데 있어서 정치의 역할이 결코 적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작금의 우리 정치는 국민의 기대에 크게 못 미친다. 이에 대해 제5부 ‘화성 여당, 금성 야당’에서 따져보았다.
해외여행을 해보면 한국이 얼마나 잘살고 얼마나 편한 나라인지 실감할 수 있다는 사람이 많다. 이런 나라를 누가 만들었는가. 전(前) 세대와 현(現) 세대의 우리 국민 스스로 만들었다. 그런 만큼 똑똑하고 위대한 국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아직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현장 곳곳에 덕지덕지 묻어 있는 후진성과 모순과 불합리는 어찌할 것인가.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할 주체도 결국은 국민이다. 선현들이 말했듯이 깨어 있는 국민이라야 산다. 이런 내용을 담은 것이 책의 제6부다. 세대 간 갈등이 더 구체화하는 상황을 보며 30대 40대를 향한 주문도 곁들였다.
이른바 진보세력 가운데는 북한의 시대착오적 생존방식을 두둔 비호하고 숭배까지 하는 세력이 있다. 종북(從北)세력이다. 이들은 북한에 대한 국론을 분열시켜 우리 정부와 군(軍)의 선택을 어렵게 만든다. 또 이런 세력에 영합하는 정치인들은 국민의 안보 불감증을 부채질한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거나 방해하는 정치인들의 안보의식은 노무현 전 대통령보다 더 심각하게 무너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북한 핵과 NLL(서해 북방한계선)에 대해 북한 입장에 부화뇌동했던 노 전 대통령보다 한 술 더 뜨는 사람들이 이번에 집권했다면 남북관계는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도 안심할 수 있다고 하기 어렵다. 5000만 국민의 머리 위에 북한 모험주의 정권이 존속하는 한,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는 없다. 책의 제7부 ‘평양을 어찌할 것인가’에는 우리 정치권의 대북 인식의 문제점, 평양 정권의 본질 등에 관한 글을 포함시켰다.
이 책이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워하고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의 공감대를 조금이라도 넓힐 수 있기를 바란다.
만 10년 가까이 기명칼럼을 쓰게 해준 동아일보가 먼저 고맙다. 매우 가치지향적인 대한민국 언론 자산으로 2020년이면 지령 100년이 되는 이 신문의 중심에서 일해 온 것이 스스로 자랑스럽다. 도서출판 프리뷰의 이기동 사장과 편집진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대한민국이 고마운 것은 말할 것도 없다.
2013년 3월
배 인 준
---「시작하는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