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으로 시작하는 글치고 변변한 글 없다. 그래서 뻔뻔하게 시작하고자 한다. 우선 『미스 함무라비』 출생의 비밀부터. 『미스 함무라비』는 『태양의 후예』의 자식이다.
원작 소설 드라마화 얘기가 처음 나왔을 즈음, 나는 특유의 ‘아님 말구’ 스피릿으로 그거 대본도 내가 직접 써보면 안 되겠냐는 말을 제작사 측에 꺼냈다. 누구나 그렇듯 나도 만화나 영화, 미드를 워낙 좋아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습작 경험은커녕 드라마 작법, 용어조차 전혀 모른다는 점. 거기다가 미드는 많이 보지만 끝까지 본 한국드라마는 손에 꼽을 정도다. 『카이스트』 『대장금』 『혼술남녀』 『나인』 『응답하라 1988』 『미생』 정도? 그런 주제에 뻔뻔하게도 직접 써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판사 이야기이니 이야깃거리와 디테일에 관한 한 내가 직접 쓰는 게 제일 나을 수밖에 없다. 작법 측면이나 기술적인 측면은 제작사 측에서 프로에게 의뢰하여 재가공할 게 틀림없으니 난 자유롭게 하고픈 얘기를 마구 쓰면 되는 것 아닌감(설마하니 내가 쓴 대본으로 그대로 찍을 줄은 몰랐다. 제작비를 아끼고 싶었던 게 틀림없다). 이런 편한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뭔가 형식이라도 알아야 될 것 같아서 제작사 측에 샘플을 좀 달라고 했더니 온 것이, 『태양의 후예』 대본 파일이었다. 그렇다. 『태양의 후예』 제작사였던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 38.8퍼센트가 봤다는 대히트작을 뒤늦게 대본으로 접하게 된 나는 O.L., 플래시컷 등 모르는 용어가 나오면 네이버 검색의 도움을 받아가며 교과서 공부하듯 죽 읽었는데, 역시 뭔가 다르더라. ‘사과할까요, 고백할까요?’ 같은 대사가 툭 튀어나오는데, 와우. 감명받은 나는 이 대히트작의 기운(?)에 묻어가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아예 『태양의 후예』 대본 파일에 덮어쓰기로 『미스 함무라비』 대본을 썼다.
파죽지세로 3부까지 쓰고는 의기양양해 있는데, 제작사 대표가 조용히 누군가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누구냐면, 바로 『태양의 후예』를 쓴 김은숙 작가! 세상에, 이건 발성 연습을 시작했는데 마리아 칼라스를 만난 격이다. 게다가 그 바쁜 작가님이 말도 안 되는 내 초고를 꼼꼼히 다 읽고는 이건 재밌고 이건 별로고, 일일이 다 줄치고 물음표 치고 표시해놓은 것이다. 여긴 지루하다, 어수선하다, 대사가 길다, 어렵다, 가차없는 야단을 맞으면서도 마스터클래스를 받는 황송함에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가르침의 핵심은, ‘재판 이야기’에 더 집중하라는 지적이었다. 그게 본질인데 자꾸 딴 데로 샌다는 말씀. 그리고 쉽게 쓰라는 지적. 시청자 대부분은 ‘배석판사’가 뭔지, 그게 사람 이름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정신이 번쩍 나는 지적들이었다. 그래도 고무적인 것은, 개그 또는 ‘심쿵’을 위해 쓴 임바른 마음의 소리들을 다 좋아하시더라는 점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로코’ 장인이 말이다. 이런 요소들 역시 함께 가져가도 좋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김 작가님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후반부 대본 어딘가에 이스터 에그처럼 살짝 녹여놓았다.
그런데, 써나갈수록 내가 정말 쓰고 싶은 것은 ‘법’이나 ‘재판’이 아니라 그걸 통해 바라본 우리 사회, 그리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20년 동안 재판을 하면서 참 다양한 사람들을 봤고, 이 사회의 볼 구석, 못 볼 구석을 봤다. 20년 동안 법원이라는 조직에서 생활하면서 마찬가지로 다양한 사람들을 봤고, 볼 구석, 못 볼 구석을 봤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 속에 쌓여온 것들이 있었나보다. 그건 솔직히 울화에 가까운 것이었다. 세상은 젊은 시절 막연히 생각한 것과 달랐다. 세상은 완고하고 인간은 제각기 어리석었다. 선악은 분명하지 않았고, 이해관계는 분명했다. 손쉬운 정답은 없었고, 자기가 정답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은 많았다. 난 홀린 듯이 내가 보아온 인간 세상의 단면들을 대본 곳곳에 채워넣고 있었다.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결론도 없이 말이다. 힘든 일상으로부터 잠시 도피하고 싶어서 TV를 켠 시청자분들께 참 못할 짓을 한 것이다.
특히 주인공 박차오름이라는 인물을 그릴 때 내가 현실에서 겪어온 혼돈과 좌절이 집중되었다. 극의 주인공이란 영웅이어야 하고, 매력적이어야 한다. 관객들이 쉽게 감정이입할 수 있어야 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웃고 울며 응원하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은 본래 지는 쪽에 판돈을 걸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국 이기는 편이 우리 편이기 바란다. 그건 본능이다. 이 모든 것을 잘 알기에 난 처음에는 박차오름이라는 캐릭터를 두 가지 중 한 가지로 만들려 했다. 대장금처럼 언제나 지고지순하고 예의 바른 천재인데 주변의 못나고 악한 자들로부터 끊임없이 일방적으로 핍박받는 인물. 아니면 요즘 트렌드를 반영하여 『마녀의 법정』의 마이듬처럼 이미 처음부터 능수능란하고 권모술수에도 능해서 든든한 인물. 하지만, 그게 안 되더라. 내가 보아온 현실과의 ‘거리 두기’가 안 되더라.
내가 현실에서 보아온 것은 내부고발자가 왕따 당하고, 피해자는 집단적 2차 가해를 당하고, 타인의 고통에는 짜증내며 자기 ‘손톱 밑의 가시’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회였다. 사람들은 늘 사회에 대해 불평하지만 정작 자기 곁의 누군가가 그것에 문제를 제기하면 시끄러워지는 게 싫어서 짜증을 낸다.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눈치 없고 혼자 예민 떨고 대책 없는 ‘갑분싸’ 또는 ‘프로불편러’가 된다. 나는 생채기 하나 입지 않으면서 멀리 어딘가에서 엄청나게 힘세고 완벽한 누군가가 나타나서 세상을 확 뒤집어 엎어주기만 바란다. 평론가 신형철이 적절히 지적했듯이, 사람들은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들인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기 때문에 뭔가 기존의 것에 문제제기를 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대체로 매사에 ‘과한’ 사람들일 때가 많다. 과하게 울고, 과하게 분노하고, 과하게 행동하고, 과하게 일반화하고. 그게 그들이 겪은 상처 때문인지, 또는 인구 중 일정 퍼센트는 유전적으로 그런 성격으로 태어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그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시대와 불화하고, 세상과 불화하고, 유감스럽게도 바로 자기 곁의 사람들과도 불화한다. 그들은 잘해야 소수의 열광적 지지를 받을 뿐 침묵하는 다수에게는 불편한 존재가 된다. 그들이 더 분노할수록 사람들은 더 그들에게 등을 돌린다. 그들은 불나비처럼 자기 몸을 불태우며 앞만 보고 나아간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비극적이다. 심지어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된 후에조차, 자신의 거친 분노를 끝내 세련되게 다듬지 못한 이는 조롱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 만다. 우리는 그들을 참 쉽게 내친다.
더욱 유감스러운 것은, 그렇다고 그들을 비극적인 영웅으로 상찬할 수만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과한 자기확신과 공격성은 그들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더 나쁜 결과를 낳을 때도 많다. 그들은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유혹에 빠지기 쉽고, 잠시 멈추어 자신이 가는 방향이 옳은지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들은 옳고자 하지만 그들 자신만으로는 계속하여 옳을 수 없다. 우리 인간은 모두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미스 함무라비』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익숙한 모든 것들에 문제를 제기하는 예외적인 존재인 박차오름이 아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이 불편한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관건이다. 안정을 해치는 위협으로 받아들인다면 시스템에는 아무 변화가 없고, 문제를 제기하는 소수는 희생될 뿐이다. 변화의 계기로 받아들인다면 시스템도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가고, 그 소수도 설자리를 얻게 된다. 『미스 함무라비』를 여주가 사고 치면 남주가 왕자님처럼 구해주는 이야기로 속단할 이들도 있겠지만, 나는 단지 여자 남자 얘기만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소수와 다수, 개인과 시스템에 더 관심이 있다. 다만 현재의 사회구조에서는 여성이 박차오름의 입장에 설 가능성이 더 높을 뿐이다.
임바른, 한세상, 정보왕, 이도연, 홍은지, 수석부장, 배곤대, 성공충, 심지어 화장실 판사들까지도 어떤 방향으로든 박차오름으로 인해 시작된 변화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 변화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 그들은 전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될 것이고, 그런 작은 변화들이 모이다보면 어느 순간 철벽같은 시스템에도 새로운 균열이 생길지 모른다. 출구 없는 분노가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의 박차오름들이 부디 벽에 몸을 던져 깨지고 마는 계란이 아니라, 벽 사이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담쟁이덩굴이 되어 살아남아주기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그러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선의를 외롭게 두지 않으려면, 우리는.
---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