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계 구조를 없애려 할 때도 많지만, 암묵적으로라도 위계 구조는 발생한다. 가정이든 학교든, 친구 관계나 연인 관계에서도 대부분 마찬가지다. 누구든 자신의 모든 책임을 홀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다. 누가 혼자 태어났겠으며, 누가 혼자 모든 지식을 깨우쳤겠는가. 혼자 회사를 세우거나, 혼자 회사 매출을 책임지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러니 대부분 어느 순간, 다른 누군가가 자기 책임을 대신해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법이며, 그 이후에야 비로소 그 권위를 인정하게 된다. 권위가 ‘책임지는 순서’이기에, 그 책임을 대신해주는 사람의 권위가 더 높아지는 건 당연한 결과이며, 이것이 어디서든 위계 구조가 발생하는 이유다. 똑같은 사람이기에, 그 존엄성의 무게는 모두 같다. 하지만 각자 선택하고 감당하는 책임의 크기에 따라 그 권위의 크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 p.66, 「권위는 책임지는 순서다」중에서
태어날 때부터 타인을 존중하는 사람은 없다. 상대방이 자기 책임을 대신해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야 비로소 그 권위를 인정하게 된다. 그런 말을 하는 권위자들도 다를 리 없다. 그런데 왜 애먼 하급자들만 탓하는 건가? 이는 권위자로서 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며, 권위자로서 해야 할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요즘 젊은 사람들, 즉 하급자들이 아니다. 우리 권위자들이 ‘권위 인정받을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것, 그것이 문제다.
그런데 이 무슨 말씀이신가? “사람은 변하지 않아.”
아니다. 사람은 변한다. 변화하지 않겠다고 선택할 때가 있을 뿐이다.
--- p.70, 「요즘 젊은 사람들이 문제다?」중에서
하급자의 책임을 대신해주기는커녕 자기 책임까지 전가하는, ‘돼지 같은 상급자’도 많다. 하지만 아직 세상에는 ‘어버이의 마음을 품은 상급자’가 훨씬 더 많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믿는다. 아니라면 상대방이 요구하기도 전에 그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왜 그리 많았겠는가. 하지만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상급자로서 하급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건 귀한 일이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상대방이 그 은혜받을 자격을 갖추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래야 그 은혜가 은혜일 수 있기 때문이며, 그 과정으로 상대방도 그 자격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직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을 필자는, 상급자들이 하급자들에게 지각없이 베푼 은혜, 즉 그 자격을 검증하지 않고 베푼 은혜라고 생각한다. 그 은혜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 하급자가 있다면, 그 은혜를 지각없이 베푼 상급자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필자는 주장하겠다. 하급자의 권위를 순수하게 인정해주는 것과 그 책임을 무분별하게 대신해주는 건 다르다.
--- p.128, 「지각 있는 사랑」중에서
하급자가 한두 번 지각했다고 당장 하급자와의 관계를 단절-해고-하는 상급자는 흔치 않다. 하급자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이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한, 대부분 하급자에게 다시 기회를 준다. 그래도 하급자를 용서하기 때문이며, 그래도 그 권위를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상급자 자신도 똑같은 실수를 저질러 보지 않았겠으며, 상급자도 자기 상급자에게 용서를 받아보지 않았겠는가.)
오히려 하급자가, 죄책감이나 수치심 탓에 무단으로 결근하거나 사직서를 제출할 때도 있지만, 그럴 필요는 사실 전혀 없다. 상급자의 권위를 인정한다면, 얼마든지 그 이상의 책임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며, 아래에서 부연하겠지만, ‘자신을 용서할 때’ 그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급자의 잘못이 아무리 커도 이는 마찬가지다. 그 잘못의 크기가 상급자 자신의 권한을 벗어나지 않는 한, 얼마든지 그 책임을 대신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다, 심지어, 그 크기가 상급자 자신의 권한을 벗어나더라도 마찬가지다. 자기 상급자와 상의해서라도, 그 책임을 대신해주려 한다.)
--- p.225
마지막 장을 마무리하며 순간적이지만,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경영은 ‘또 다른 나를 만드는make 일Work’이다”라는 문장을 입력하던 중 손가락이 제멋대로 움직이더니, ‘만드는’을 ‘만나는’이라고 입력해버렸다. 뭔가 기분이 묘했다.
--- p.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