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가난해지는 사람은 자신만이 실패자라고 느낄 필요가 없다. 훨씬 더 포괄적인 과정의 일부로 가난해지는 것이며, 따라서 그의 운명은 역사적인 차원을 가진다. 이것에 위로를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혼자서 개인적으로 실패하는 것보다는 시대와 함께, 자신이 속하는 사회계층 모두와 함께 물러나는 경우가 견디기 훨씬 쉽다.---pp.15~16
내 옛 동료 하나는 일하던 신문사가 폐간되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었는데, 지금도 무척 바쁜 언론인인 척한다. 오후에는 정부 청사가 모여 있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간단한 다과가 접대되는 기자회견장을 우아하게 찾아간다. 그러면 점심 식사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가 말을 걸면 사실은 맡은 일이 없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따금 텔레비전을 보다 뉴스 전문 채널을 틀면 기자회견장의 복작거리는 기자들 틈에 끼여 열심히 메모를 하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 식으로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는 오로지 일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가정 때문이다.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분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일이 본연의 삶을 가로막는 것이라고 여겼다. 일의 의미와 목적은 여가를 즐기기 위한 데 있었다. 이제 다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 ---pp.74~75
최근에 나는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던 옛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그 친구가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것에 깜짝 놀랐다. 나는 그를 대단한 포도주 전문가이며 애호가로 기억하고 있었다.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이따금 포도주 감정가로 일할 정도였다. 그 친구는 좋아하는 포도주를 더 이상 마실 처지가 못 된다며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그나마 임시변통으로 마실 수 있는 보르도산 포도주는 주머니 사정을 능가하고, 싸구려 묽은 포도주는 사절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 그 친구는 포도주가 아니라 물과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음료인 독일 맥주만을 마신다.
우리 모두 포도주를 마시던 시절에 맥주를 사회적으로 약간 열등한 것으로 무시하지 않았던가? 포도주의 독한 맛을 잘 구분하지 못하면서도 더 우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흔히 파티 석상에서 맥주 대신 포도주에 손을 뻗치지 않았던가? 그런데 유럽의 뛰어난 포도주 전문가가 수십 년 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이제 맥주만을 마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pp.100~101
낯선 나라로의 여행, 해변의 달콤한 삶, 호화 유람선 항해와 고급 호텔, 수영장의 이국적인 음료수…. 이런 비슷한 상투어들이 우리에게 발휘하는 터무니없는 매력은, 해당 업계가 우리의 의식 깊숙이 파고 들어 여행 그 자체가 충분히 탐낼 만하거나 매혹적인 것이라고 잘못 유포시킨 결과이다.
(…)
1년 내내 절약하다가 휴가라고 갑자기 돈을 흥청망청 뿌리고(드디어 휴가 여행을 떠나오지 않았는가!) 지갑이 가벼워지는 것에 비례하여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다고 화내는 것도 완전히 비이성적인 짓이다. 독일인들이 오스트리아나 이탈리아, 그리스나 스페인으로의 여행 중에 번번이 걸려드는 도박 신드롬은 다행히도 유로의 도입을 통해 조금 저지되었지만, 관광객들을 위한 함정에 빠져서 태연하게 돈을 빼앗기는 것은 여전히 휴가 여행의 가장 인기 있는 행사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집에서는 절대로 손도 대지 않을 질 낮은 포도주와 럼주 섞인 달콤한 음료수도 태연하게 마신다. 그러면서 호텔에 묵는 ‘사치’를 누린다고 즐거워한다. ---pp.117~120
나는 오랫동안 본의 아니게 부유한, 그야말로 무척 부유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 흥미 있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었다. 취향이 고상한 부자들은 예로부터 간소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부유한 사람일수록 ‘평범한’ 삶을 흉내 내는 것을 사치스러운 일로 여긴다. (…)
화보 잡지 독자들이 입 벌리고 부러워하는 부자들의 관습인 요트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것도 비슷한 종류이다. 요트에서의 삶은 부자들에게 바로 캠핑이나 다름없다. 부자들은 비좁은 공간에서 함께 북적거리고, 작은 선실에서 두세 사람이 섞여 잠을 자고, (…) 간단히 말해 ‘소박한 삶’과 가까이 있는 것을 즐거워한다. 화보 잡지 독자들은 귀하신 분들이 갑판 위에서 햇볕을 쬐며 기지개 켜는 모습을 보고 참 격조 높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부러움을 받는 사람들은 사실 화보 잡지 독자들의 삶을 흉내 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일 뿐이다. 그러면서 햇빛 아래서 책을 읽는 것이 피곤하기 때문에, 입 벌리고 감탄하는 사람들이 읽는 것과 같은 화보 잡지를 읽는다. ---pp.182~183
‘로빈슨 크루소의 원칙’을 매혹적이게 하는 것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긍정적인 사고’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삶의 우여곡절을 받아들이고, 희생자의 역할에 파묻히는 대신 끝까지 행위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는 능력이다.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라고 설파하는 서적들의 잘못된 점은, 행복의 진부한 상투어를 독자들 눈앞에 들이밀면서 이루지 못할 기대를 일깨워 불행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원래 어떤 삶이든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행복해지려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지하고 이루지 못할 꿈을 뒤쫓지 말아야 한다. 삶의 기복, 존재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사람은 영원한 건강, 갈등 없는 배우자 관계, 물질적인 소원의 성취를 뒤쫓는 사람보다 어쨌든 행복한 삶을 영위할 가능성이 더 많다. 게다가 경이롭게도 행복은 외적인 상황과 무관하다. 부유하고 건강하고 가족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극도로 불행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찢어지게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데도 행복한 사람들이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영원한 행복의 이상향을 추구하는 사람은 확실하게 불행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평생 물질적인 부만을 쫓아다니는 사람은 결단코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pp.207~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