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의 존재야말로 일본 권력자들의 탁월함의 상징이며 표현이다. 권력자의 머리 위에 천황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편한 줄 아는가. 그들이 신민들의 살과 뼈를 아무리 바수어도, 그 피가 강이 되어 흘러도 권력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천황이 권력의 칼을 하사했고, 천황이 명령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천황마저 하늘의 존재로서 지상의 논리로부터 벗어나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일본의 권력자들은 땅의 파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간의 땅에 아무리 악이 넘쳐 흘러도 그것은 하늘의 뜻인 것이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는 불충이며, 그것을 받들지 못하는 것은 치욕일 뿐이다. 하야시의 사상은 이러한 일본의 권력자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자 부정이며, 냉소이며 초월이다. 하야시는 박해받은 자의 고통과 비명은, 그 살과 뼈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하야시는 사상으로써 일본의 권력을 냉소했고,실천으로써 천황을 향해 다가갔다. 인간에게 종족 보존의 본능이 있듯이 사상을 보존하려는 본능도 있다. 그 사상의 혈맥을 하야시는 너에게 잇고자 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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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에 손가락이 끊기고, 죽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음에도 아버지는 일본인들의 어릿광대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입에서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튀어나오면 아버지는 무릎을 꿇고 엉금엉금 기기도 하고 깡충깡충 뛰기도 했다. 그러다가 흙을 입에 틀어넣어 우물우물 삼키는가 하면 땅바닥을 혀로 핥기도 했다. 그들은 명령했고 아버지는 철저히 복종했다.
아버지의 마지막 어릿광대 모습은 일본인들의 신발밑창을 핥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피에 물든 혀를 길게 내밀고 그들의 신발 밑창을 열심히 핥았다. 그들은 좀처럼 만족하지 않았고 아버지는신발바닥이 하얗게 되도록 핥고 또 핥았다. 하지만 그 대가는 죽음이었다. 일본도가 허공에서 번뜩였다. 피가 솟구쳐 올랐고 아버지의 목은 옆으로 기울어졌다. 아버지는 죽음직전까지 애걸하고 있었다. 칼이 허공으로 치솟을때도 일본말로 뭐라고 외치며 빌었다. 무엇을 빌었을까? 일본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나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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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격렬히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숨겨진 불의 모습이 마침내 제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애태껏 불은 존재하고 있었으나 환각의 모습이었다. 뜨겁게 타오르고는 있었으나 형상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내 불은 형상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 불은 오직 한 사람밖에 움켜쥘 수 없는 것이었다. 불의 공간은 홀로의 공간이며, 홀로의 황홀이었다. 정준영의 황홀과 나의 황홀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었다.
이틀 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에 나는 정준영의 방으로 몰래 들어가 다다밋방 밑에 숨겨두었다는 권총을 찾았다. 그의 말은 틀립없었다. 나는 권총을 품안에 넣고 방을 나와 골목에서 그를 기다렸다. 먼 곳의 불빛이 골목을 어슴푸레 비추기는 했으나 달빛 없는 어둠은 깊고 음습했다. 이윽고 발자국 소리가 났고, 정준영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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