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원하는 곳은 어디든 아무 데나 갈 수 있어서 좋겠다.’
윤승의 두 눈이 빨려 들어가듯 나비에게로 향했다. 검은 점이 콕콕 박힌 노란 나비는 누나가 즐겨 수놓던 나비와 똑 닮아 있었다. 누나를 잠깐 떠올린 것만으로 윤승의 마음은 방금 파낸 땅처럼 헤집어졌다.
--- p.9
윤승이 쥔 바늘이 비단옷 위를 오르락내리락하자, 나비의 날개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윤승은 황토색 실을 다시 바늘에 뀄다. 바늘이 새롭게 지나간 자리마다 날개에 음영이 생겼다. 팔랑거리며 당장이라도 날갯짓을 할 것 같았다.
--- p.20
처음에는 그저 아픈 누나 대신 어머니를 돕기 위해 실을 잡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바느질이, 특히 수를 놓는 게 즐거웠다. 현실이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색색의 실만 있으면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 좋았다.
--- p.21
윤승은 할 수 있다고 계속 고집을 부렸고 기어코 모란 수를 뜯어냈다. 새로 수를 놓을 땐 꽃잎 가장자리에 짙은 붉은색 대신 보색에 가까운 청록색 실로 수를 놓았다. 그랬더니 꽃이 더 화사해 보였다. 또 다른 꽃에는 붉은색과 청록색 실을 꼬아 만든 꼰사를 사용했다. 이렇게 꼰 실은 조금 떨어져서 보면 마치 자색처럼 보였고 꽃에 입체감을 더해 주었다. 윤승은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등잔불 아래서 실을 꼬고 수를 놓았다.
--- p.37
윤승은 꽃잎의 갈라진 부분에 기준이 되는 땀을 놓았다. 한쪽 면을 채웠다. 짧게, 길게, 다시 짧게, 그리고 길게. 땀의 길이에 변화를 주며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그런 뒤 좀 더 진한 분홍색 실을 뀄다. 누나를 향한 그리움이 깊어지듯 연분홍에서 진분홍빛으로 꽃잎의 빛깔도 짙어졌다.
--- p.51
꽃잎이 한 장씩 비단실로 채워지고, 서서히 입체감이 드러나면서 모란꽃에 생기가 감돌았다. 꽃이 모두 완성될 때까지 윤승은 단 한 번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오롯이 수놓는 일에만 집중했다.
--- p.52
바구니 안에서 금사가 감긴 나무 실패를 집어 들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윤승은 금사를 적당한 길이로 자른 다음 징그는 실로 금사를 고정했다. 금박이 벗겨질까 봐 동작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모란 꽃잎 가장자리를 둘러 가며 일정한 간격으로 금사를 징겄다. 특히 바깥쪽에 달린 꽃잎에는 금사를 한 바퀴 돌려 징거 주었다. 그렇게 하면 꽃잎 끝에 물방울이 맺힌 것처럼 싱그러운 느낌이 들었다.
윤승은 모란꽃을 모두 금사로 징근 후, 끝점에 남긴 금사를 힘 있게 천 아래로 잡아당기고 적당한 길이로 잘라 냈다. 마지막으로 뒷면의 실밥까지 꼼꼼히 정리했다.
--- p.53
머릿속에 모란이 피고 나비가 날아다녔다. 눈감고도 수놓을 수 있을 만큼 익숙한 것들. 윤승은 모란과 나비가 글자의 획 안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했다. 이렇게 하면 그림이 글자가 되나?
‘아니야. 획이 뚜렷하게 남아 있으면, 그냥 글자 옆에 그림이 있는 것처럼 보일 거야. 게다가 모란과 나비는 이 글자들의 뜻과 아무 상관도 없잖아.’
윤승은 종이를 끌어와 붓을 들고 서신에 적힌 두 글자를 커다랗게 따라 그려 보았다. 慕와 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
--- p.101
“질문이 어려우냐? 그럼 이렇게 묻겠다. 너는 무엇을 위해 수를 놓느냐?”
--- p.117
“세자빈? 조선의 세자빈마마를 위해 그림 문자를 수놓아야 한다고?”
서 사부가 또 윤승의 말을 잘랐다. 목소리에 노기가 어렸다. 조금 전까지 서 사부 얼굴에 있던 웃음기는 사라지고 눈썹이 일그러졌다. 순식간에 방 안 공기까지 차갑게 식어 버린 듯했다. 윤승은 서 사부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네가 세자빈마마를 위해 만들어야 한다는 그림 문자보다 더 중요한 게 뭔지 아느냐?”
윤승은 영문을 모른 채 서 사부를 바라보았다.
“왜 수를 놓는지 아는 거다. 그걸 모르면 재주가 있어도 남들에게 휘둘리기만 하고 자신을 위한 삶을 살 수 없다.”
--- p.119
윤승은 날마다 눈을 뜨면 곧장 만수각으로 향했고 별을 보며 심양관으로 돌아왔다. 밤에는 등잔불을 켜서 다음 날 쓸 꼰사를 만들고, 수놓을 부분을 자투리 천에 미리 연습하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이것이 서 사부가 말한 나를 위한 삶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것,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싶은 바람과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과정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 p.136
“아버지는 늘 우리가 본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하셨어. 저 너머에 더 큰 세상이 있다고. 언젠간 그 세상을 자수로 담아낼 거래. 나도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어. 그곳에…… 너도 꼭 같이 갔으면 좋겠어.”
--- p.147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똑같이 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누가 자기 신분을 바꿔 주기라도 한단 말인가? 타고난 신분보다 아래로 내려갈 수는 있어도 위로 올라갈 수는 없다. 그것이 윤승이 사는 세상이었고 엄혹한 현실이었다.
“나는 모든 사람은 다 똑같이 귀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야.”
--- p.173
“야소(예수)라는 분이다. 야소님은 모든 사람이 다 귀하다고 하셨지. 황제도 노예도, 남자도 여자도 모두 똑같이. 바로 이 책, 《천주실의》(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한문으로 쓴 기독교 교리서)에 나온 말이다.”
--- p.184
“《천주실의》에 쓰인, 모든 사람이 다 귀하게 대접받는 세상이 정말 있는지 내 눈으로 보고 싶구나.”
--- p.186
“수놓는 재주는 내가 세상을 살아갈 힘을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래도 그동안 깨달은 것이 있다. 재주를 갈고닦는 것이 오롯이 나의 책임인 것처럼, 이 재주를 어떻게 사용할지도 내가 결정할 일이라는 것이다. 황제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 그 꿈이 나의 꿈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 p.186
‘자수로 펼치는 꿈이라고?’
윤승은 초상화에 눈을 고정한 채 그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할까? 모두가 귀하게 대접받는 그런 세상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꿈을 펼치는 일이?
자수에서 없어도 되는 땀은 없다. 땀마다 제 역할이 있어서 어떤 땀이 뜯겨 나가면 구멍이 뻥 뚫릴 것이다. 서 사부가 꿈꾸는 세상이 그런 곳일까? 수많은 땀이 모여 온전한 자수 작품을 이루는 것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의 꿈을 펼칠 수 있는 세상, 그 꿈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세상?
--- p.187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귀하다. 그것이 윤승에게 들어맞는 말이라면 부카에게도 똑같이 해당하는 말일 것이다. 윤승은 자기의 삶이 지금과 달라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용기, 어쩌면 그것인지도 모른다.
--- p.197
“괜찮을 수도 있겠다 싶어. 너와 함께 간다면.”
양양은 싱긋 웃었다. 그 웃음이 윤승을 설레게 했다. 그래서 윤승도 따라 웃었다.
“그곳에서 나는 그림을 그리고, 너는 수를 놓고. 우리만의 꿈을 펼칠 수 있을 거야.”
꿈이라는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리만의 꿈. 윤승은 그 말을 한 번 더 속으로 되뇌었다.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고 그 느낌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지기는커녕 알 수 없는 감정이 잇따라 솟구쳤고 점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것은 윤승이 태어나서 처음 가져 본 자기 삶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 p.202
한 땀 한 땀 수를 놓아야 하는 자수처럼, 내가 선택한 것을 이루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 보면 꿈꾸던 것을 이루고 언젠간 누나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늘 높이 떠오른 해가 빛을 뿜어냈다. 강렬한 빛의 줄기는 뭉게구름을 만나 주변으로 따스하게 퍼져 나갔다. 따스한 햇살을 머금은 강물이 온 힘을 다해 빛을 반사했다. 반짝이는 강물을 보며 윤승은 두 팔을 펴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바람은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게 윤승과 양양을 실은 배를 강 저 너머로 데려다주었다.
--- p.202-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