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대단한 연주자였다! 음악을 극히 지적으로 이해하면서 그토록 멋지고 당당하게 몸으로 녹여 보여주는 마술과도 같은 솜씨를 지닌 피아니스트를 나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19세기에 리스트가 그랬다는 얘기를 우리는 들었고, 비교적 최근에는 아르투르 슈나벨이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건반을 부드럽게 애무하며 마치 한 끼 식사를 하듯이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연주를 하긴 했지만 말이다.
또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로켓처럼 화려하게 작열하는 연주로 자신을 거세게 몰아붙인 다음 마치 기도하듯 얼굴을 드는 독특한 방식으로 연주했던 기억도 난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또한 나름의 진가를 인정해야 할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화강암 같은 육중한 몸뚱이를 건반 위로 꾸부정하게 구부리고서 견고한 자세로 거의 움직이지 않으면서 대신 잽싼 손가락으로 소름이 끼칠 만큼 섬세한 음을 뽑아내곤 했다. 이러한 명연주자들은 눈과 귀를 동시에 현혹시키는 춤꾼을 닮았다. 그들은 종교적인 헌신성에서 성적인 황홀감까지 포함하는 폭넓은 감정을 전달하며 정신과 몸이 하나가 된 힘으로 사람을 감응시킨다.
--- p. 30-31
방금 차가운 공기와 바람에 민감하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던 굴드는 차 안에서 노르웨이 작곡가 에드바르트 그리그가 자기 친척이라는 사실을 열정적으로 얘기했다.
"그리그는 우리 어머니의 증조할아버지 사촌이었어요. 본래 스코틀랜드 가계 출신인데, 외가 쪽 집안은 원래 철자 그대로 '그레이그(Greig)'라는 이름을 충실히 유지했고, 노르웨이에 정착한 조상들은 북구적인 느낌이 들도록 모음 두 개를 엇바꿔 '그리그(Grieg)'라는 이름이 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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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0월 9일, 막 열일곱 살이 된 글렌은 독주회에서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의 소나타 7번 내림 나(B플랫)장조, 작품 83을 연주했다. 강하고 요란한 이 작품은 1942년, 러시아가 한창 전쟁 중이었을 때 작곡된 신곡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대담함과 영웅주의, 감내와 비극 등 전쟁 시기에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들을 표현하고 있다.
이 소나타는 유명한 피아노의 명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도 관련이 깊은 작품으로, 호로비츠는 미국에서 이 작품을 초연했다. 글렌은 이 까다로운 작품을 단지 몇 주 만에 마스터해버렸는데, 나중에 이 소나타를 녹음한 음반으로 판단해보건대 이 날 그의 연주는 젊은 피아니스트가 끌어낼 수 있는 에너지와 힘을 모두 표출한 것이었으리라.
이 곡을 연주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바라던 바를 한 가지 이룰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제부터 그의 프로그램에는 이전에 연주해왔던 대중적인 레퍼토리에서 벗어난 독창적인 작품들이 선보일 것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준 것이었다. 하이든과 스카를라티, 그리고 리스트와 쇼팽은 이제 쫓겨난 어린 시절의 놀이동무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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