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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린 각자 긴 시간을 고민했다. 길이 아닌 곳에 길을 만들어 앞으로 걸어가면서, 혹시 실수한 것은 아닐까, 그냥 얌전히 있을걸, 더 앞으로 가다가 잔뜩 후회만 하고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전진했고, 1년 3개월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여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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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수정> 라왈판디는 아무 볼거리도 할 일도 없는 참 무미건조한 곳이다. 그런데 우린 벌써 5일째 이곳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다. 이유는 이란 비자 때문에. 앞으로도 열흘은 더 기다려야 한다. 이란은 강경 이슬람 국가라 웬만해서는 비자를 잘 내주지 않는다...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고의가 아니니 화낼 수도 없고, 정말이지 울화통이 치민다. 쟤들은 어쩜 저렇게 만사에 천하태평일 수 있을까. 어쩜 저렇게 준비성이 없을까. 여행 정보도 맨날 내가 구해오고, 여행은 나 혼자 하나?
<작은 수정> 건하언니는 오만에 가는 걸 원하지 않는다. 원래 계획대로 이란에 가서, 될 수 있으면 본래 들어가려고 했던 8월에 여행을 마쳤으면 하고 있다. 수정 언니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별로 알려지지 않은 오만과 예맨 여행을 감행하고 싶어한다. 난 어딜 가든 고민 좀 그만하고, 빨리 떠났으면 한다...둘은 서로를 굉장히 무서워한다. 둘 다 나는 하나도 안 무서워한다. 난 둘 다 무섭다. 이것이 우리 셋의 권력 구조다...괜히 애꿎은 나까지 아무 데도 못 가소 있다.
<건하> 며칠 전 밀란 쿤데라의 '향수'라는 책을 읽었다. 나도 지금 향수병을 앓고 있는 것일까?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친다. 식욕도 없고, 어디 가고 싶은 의욕도 없다. 집 생각만 난다...오만이나 이란이니 다 때려치우고 당장 달려가서 언니 결혼식이나 봤으면 좋겠다. 보고 싶다, 내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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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는 이렇게 새로운 의욕에 가슴이 터질 것 같고, 가득 충전된 배터리처럼 기운이 솟아나지만 이러다 시간이 지나면 언제 다시 예전의 나, 현실에 묻혀 버린 나로 돌아갈지 모른다. 그래서 지금 다짐한다. 그럴 때마다 에베레스트에서 주워온 초록 돌맹이, 사하라 사막에서 퍼 온 한 줌의 모래를 보며 여행에서 담아온 그 모든 것들을 잊지 않고 살기로. 마지막으로 우리 여행이 무사히 끝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는데, 너무 많아서 그냥 생략해야겠다. 하지만 이 말만은 꼭 해주고 싶다. " 큰 수정, 작은 수정, 끝까지 함께 해줘서 정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