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성 음료’라는 게 있다. 마시면 ‘살이 빠지고’, ‘변비 해소에 도움이 되며’, ‘에너지를 공급해 준다’며 선전하는 음료이다. 기능성 음료 중에 ‘에너지 음료’가 가장 많이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에너지 음료’의 칼로리는 110kcal 안팎으로 일반 청량음료와 비슷한 수준이니 ‘에너지 공급’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에너지 음료’가 여느 것과 다른 점은 카페인이 들어 있다는 것이니 ‘각성 음료’라 하는 게 성질에 더 맞는다. ‘각성 음료’라 하면 ‘에너지’라는 말에 넘어가 ‘카페인 흡입’하는 청소년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p.65
‘얼룩배기’와 ‘얼룩백이’는 얼룩빼기의 잘못이다. ‘-빼기’는 ‘그런 특성이 있는 사람이나 물건’ 또는 ‘비하의 뜻’을 나타내는 접미사로 곱빼기, 밥빼기(동생이 생긴 뒤에 샘내느라고 밥을 많이 먹는 아이), 코빼기(‘코’를 속되게 이르는 말), 악착빼기(몹시 악착스러운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처럼 쓰인다. 얼룩빼기는 ‘겉이 얼룩얼룩한 동물이나 물건’이니 얼룩빼기 황소는 얼룩소의 하나이다. ‘얼룩 황소’가 왠지 이상하게 들린다면, 황소를 털 빛깔이 누런 누렁소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황소는 큰 수소이다. 황소에는 얼룩빼기도 있고 검은 것도 있는 것이다.--- p.86
문화방송이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소개한 ‘싱크홀’은 외국의 불가사의한 현상을 엮어 전한 ‘남의 얘기’였다.(2010년) 서울방송이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괴구멍 미스터리, 싱크홀의 정체는?’을 다루면서 비로소 ‘한국도 싱크홀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2012년) 기사 검색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내 언론에 ‘싱크홀’이 등장한 때는 2010년이다.(네이버) 나라 밖 소식으로 이따금 알려지기 시작한 ‘싱크홀’은 국내 발생이 늘기 시작한 2012년 이후 기사 빈도가 늘어났다. 최근 ‘제2롯데월드’ 공사 현장 근처 사고로 “수도권 주민 95%, ‘싱크홀 무서워’”하는 세상이 되었다.
‘싱크홀(sink hole)’이 낯설 때, 매체들은 ‘순식간에 땅이 푹 꺼져 버리는(현상)’, ‘멀쩡하던 땅이 갑자기 꺼져 생기는 구멍’, ‘(땅이) 가라앉아 생긴 구멍’, ‘지반이 붕괴되는 (현상)’, ‘거대 구멍’, ‘움푹 팬 웅덩이’, ‘지반침하’ 따위의 설명을 붙였다. 명사인 원어를 설명적으로 다루거나, 웅덩이(움푹 파여 물이 괸 곳)처럼 풀이가 적절하지 않은 것도 있다. ‘땅꺼짐’은 어떨까. 널리 쓰이고 있고(14만 2,000건, 구글), 정부 발표문에도 나오는 표현이다.(‘물 관리 종합 대책’, 1996년 8월)--- p.107~108
‘어부의 그물에 걸린’ 명태는 망태이고, 낚시로 잡은 것은 조태라 한다. 갓 잡아 싱싱한 명태는 ‘선태’, 큰 명태는 ‘왜태’라 일컫는다. ‘미라가 된’ 것은 북어 또는 건태라 하는데 이 중에 ‘얼었다 녹았다’를 20회 이상 거듭해야 한다는 ‘황태’를 으뜸으로 친다. 어린 명태는 ‘아기태’인데 ‘명태의 새끼’는 따로 노가리라고 부른다. 꾸들꾸들하게 반건조 시킨 명태는 ‘코다리’라 한다.
이 모든 것의 ‘원형’인 명태는 ‘명천(明川)에 사는 태씨(太氏)가 물고기를 낚았는데, 이름을 몰라 땅이름의 첫 자(명)와 고기 잡은 이의 성(태)을 따서 이름 붙였다’한다. 제물포조약 체결 때 우리 측 ‘수석대표’를 맡기도 한 이유원이 펴낸 [임하필기] ‘문헌지장편’에 나오는 기록이다. ‘원산에 가면 명태가 땔나무처럼 쌓여 있다’는 얘기도 여기에 나온다. 한때 지천이던 명태가 금태(金-)가 된 지 오래이다. 우리 앞바다에서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p.66-67
‘호프’는 맥주의 쌉쌀한 맛을 내는 재료에서 온 말이 아니다. 맥주나 약재의 원료로 쓰는 열매는 홉(hop)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호프(hof)’를 독일어로 밝히면서 ‘한 잔씩 잔에 담아 파는 생맥주. 또는 그 생맥주를 파는 맥줏집’이라고 설명한다. 호프=맥주, 맞는 걸까. 텔레비전 프로그램 [미녀들의 수다]에 출연한 독일인 미르야 씨는 ‘호프집에서 맥주를 파는 모습에 놀랐었다’며 호프는 독일어로 ‘농장’이라고 했다. 그렇다. ‘호프’는 맥주가 아니고 농장(또는 (큰)마당)이다. ‘호프집’은 옥토버페스트가 열리는 뮌헨을 비롯한 독일 맥줏집이 광장처럼 넓기에 ‘독일인들이 호프(마당, 광장)에서 맥주 마시는 것’을 보고 만든 말일 것이다. 외래어로 받아들일 때 원뜻이 변해 ‘한 잔씩 담아 파는 생맥주’로 자리 잡았다 해도 어원과 풀이는 제대로 밝혀야 한다. 독일어로 ‘농장, (넓은)마당, 광장’을 ‘생맥주’로 둔갑시킨 [표준국어대사전]의 뜻풀이가 그래서 아쉽다.--- p.288-289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난 이 유물에는 ‘물가풍경무늬 정병’이란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상감기법의 하나인 ‘은입사’로 만든 ‘포류수금(창포, 버드나무 따위의 물가 식물과 물오리, 기러기가 어우러진 물가 풍경)’ 무늬의 ‘정병(물병)’이니 편한 옷으로 제대로 갈아입는 셈이다. 이것만 그런 게 아니었다. ‘수뉴문병(垂紐文甁)’은 ‘끈무늬 병’으로, ‘주자(注子)’는 ‘주전자’로, ‘미원계회도(薇垣契會圖)’는 ‘사간원 관리들의 친목 모임’처럼 쉬운 이름으로 바뀌어 관람객을 맞고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2005년 시월 용산으로 터전을 옮기면서 ‘전시 용어 개선 작업’을 한 덕분”이라는 게 박물관 쪽의 얘기이다. 어려운 한자어 속에 갇혀 있던 유물의 본색을 쉬운 우리말로 풀어낸 덕에 자칫 퀴퀴해질 수 있는 박물관이 우리 곁에 살아 있는 것이다.--- p.22
1990년대 등장한 ‘간절기’는 2000년 국립국어원 ‘신어 자료집’에 오르면서 세력을 얻는다. 뜻풀이는 ‘한 계절이 끝나고 다른 계절이 올 무렵의 그사이 기간’이니 ‘환절기’와 다르지 않다. ‘간절기’는 일본어 ‘節氣の間(절기의 사이)’의 ‘간(間, あいだ)’을 앞에 앉혀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절기(節氣)는 ‘계절 바뀜’과 무관한 것이니 ‘간절기’를 우리말답게 쓴다면 ‘주로 패션 업계에서’처럼 쓰임을 명시하고 한자도 ‘간절기(間節期)’로 밝혀야 한다. 수다한 동의어와 유의어는 말글살이를 풍요롭게 하기도 하지만 혼란을 불러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p.37
조선 시대 19대 왕인 숙종이 새해 덕담을 담아 숙휘 공주에게 보낸 한글 서찰의 한 대목이다. 숙휘 공주는 드라마 〈마의〉에도 등장하는 인물로 숙종의 아버지인 현종의 동생이다. 위 글월의 뜻은 ‘고모님께서 신년에는 오랫동안 앓고 있던 병이 완치되었다 하시니 기쁩니다’이지만 이 편지를 받은 주인공은 끝내 병상 털어 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임금이 제 식구의 병세도 알지 못하고 덕담 편지를 보냈을까.
이 서찰을 공개한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뜻으로 명령형을 쓰지 않’은 조선 시대 덕담에는 ‘희망과 기대를 확정형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새해 인사에 바라는 바를 확정된 사실로 표현한 까닭은 간절한 희원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신다니 축하합니다’, ‘소원 성취했다니 좋구나!’처럼 요즘 덕담을 ‘조선 스타일’로 바꾸어 보니 그리 낯설지 않다. 웃어른에게 ‘(복)받으세요’, ‘(부자)되세요’처럼 명령형을 쓰지 않을 수 있으니 또한 괜찮다. “독자 여러분, 두루두루 만사형통하신다니 축하합니다.” 조선 시대 인사를 본떠 드리는 인사말이다.
--- p.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