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특정한 군사행동을 취해야 할 때, 우리는 항상 가장 과감한 행동과 가장 신중한 행동 중에서 양자택일을 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전쟁 이론이 언제나 후자, 즉 신중한 행동을 권장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전쟁 이론이 권고하는 것이 있다면, 가장 결정적인 행동, 즉 가장 과감한 행동을 취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전쟁의 본질이다. 하지만 전쟁 이론은 지휘관이 자신의 용기, 도전정신, 자신감에 따라 나름대로 과감한 행동을 하도록 지휘관의 재량에 맡긴다. 따라서 지휘관은 이와 같은 내적 능력을 바탕으로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과감성 없이는 위대한 지휘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 칼 폰 클라우제비츠, 『전쟁의 원리』, 1812년
전투기획자, 몽고메리
세 사람 중 몽고메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소모적인 참호전을 경험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병사들이 아무런 성과도 없이 죽음으로 내몰렸으며 그런 식의 전쟁수행은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능력한 장군의 빈약한 계획과 일선부대와 지휘소 간의 열악한 통신체계 때문에 전쟁이 비효율적으로 수행됐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이 참모로서 계획업무와 통신절차를 개선함으로써 전쟁에 더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느꼈다. 몽고메리는 처음부터 ‘전선 너머’를 생각했으며 전투는 시작 전부터 본부에서 내린 결정에 의해 이미 승패가 결정된다고 확신했다.
그는 지휘방식 또한 유별나서 의도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모든 부하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2차대전 당시 그는 예하의 모든 부대들을 방문했으며, 전용차의 지붕 위에 컬러 라이트를 달아서 병사들에게 자신을 알렸다. 그의 군대는 ‘지휘관인 동시에 마스코트’를 원했다. “나는 의도적으로 이 두 번째 요구조건을 충족시키는 일을 시작했다. 그것은 병사들이 자신을 전투에 내보내는 사람을 한 명의 개성 있는 인간으로서 인식하게 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본문 196쪽) 그의 유명한 검은색 전차부대 베레모는 이러한 이유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지휘관으로서 몽고메리는 대부분의 경우 신중하고 천천히 전진했다. 북아프리카에서 그의 적수였던 롬멜은 그러한 몽고메리의 신중성 덕분에 독일아프리카군단을 후퇴시킬 수 있었다. “영국군 지휘관은 지나치게 신중한 경향을 보여주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절대 모험을 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과감한 해법은 그에게는 전적으로 낯선 존재이다. … 나는 몽고메리가 아무런 위험도 없이 추격을 감행해도 될 때조차, 과감하게 추격해 우리를 추월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매우 만족한다.” (본문 247쪽)
몽고메리는 모든 관련자들에게 자신의 방식대로 전투를 치를 수 있고 그럴 의지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몽고메리는 연합군이 전력을 집중하고 자신을 지상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면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원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방식으로 전쟁을 이기는 것이었다.
몽고메리, 현재 살아 있는 군인들 중 가장 위대한 자.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몽고메리는 영국의 가장 위대한 장성이다.
-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Gerd von Rundstedt
용맹의 화신, 패튼
“대담하게, 대담하게, 항상 대담하게L'audace, l'audace, toujours l'audace.”
프로이센Preussen의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sse이 말한 이 인용구는 패튼의 군대경력에 있어서 그의 표어가 되었다. 그는 플루타르코스Ploutarchos나 크롬웰Crowell, 나폴레옹Napoleon, 클라우제비츠Clausewitz의 책을 읽었고,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자신이 카이사르의 10군단으로 행군하거나 나폴레옹과 함께 모스크바Moskva에서 후퇴하는 동안 일개 병사로서 싸우다 죽었다고 주장했다.
패튼은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항상 연설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그렇게 그는 적의 사격을 당해 본 적도, 누구를 죽여 본 적도 없었던 ‘전쟁 연습 참가자’들을 ‘살인자’로 바꾸어 놓았다. “전투는 우리가 참아야만 하는 끔찍한 고통이 아니라 근사한 경험이다. 바로 그 속에서 인간을 짐승보다 우월하게 만드는 모든 요소들, 즉 용기와 희생, 이타심, 임무에 대한 헌신이 발현된다. 영광스럽게도 우리가 무찔러야 할 적들은 훌륭한 병사들이다. 그들에게 승리하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만 한다.” (본문 175쪽)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원리Die Grunds?tze des Kriegf?hrens』에서 “과감성 없이는 위대한 지휘관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패튼이야말로 그 적절한 예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전술교리에서 이러한 ‘과감성’을 확인할 수 있다.
“신속하게 이동하고, 맹렬하게 공격하라. 전쟁은 전투를 의미한다. 전투는 살인을 의미하는 것이지, 참호를 파라는 의미가 아니다. 적이 동요할 때, 신중함 따위는 바람에 날려버려라. 격렬한 추격만이 교전에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다. 신중함은 새로운 전투를 초래할 뿐이다.” (본문 84쪽)
“어떤 전차도 적에게 항복하거나 적의 전리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적에게 둘러싸인 채 혼자 남았다면, 끝까지 사격을 멈추지 마라. 만약 대포를 사용할 수 없게 되면, 권총으로 싸우면서 무한궤도로 적을 짓밟아라. 제군들이 미국의 첫 번째 전차병임을 잊지 마라. 제군들은 ‘미군 전차는 절대 항복하지 않는다’는 전통을 확립해야만 한다.” (본문 77쪽)
패튼은 미국 최고의 군인이다.
-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패튼 장군은 파헤치고 다그치고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는 미군 지휘관이다.
- 〈NBC〉
속도전의 대가, 에르빈 롬멜
롬멜은 1차대전 당시 현장지휘에 대한 자신의 천재성을 최초로 과시했다. 아르곤 지역에서 롬멜과 그의 부하들은 프랑스군의 진지로부터 소화기 공격을 받는 가운데 최전방 참호의 흉벽을 넘어 앞으로 돌진했다. 좌우익의 공격이 모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롬멜은 자신의 의지력(그리고 권총)에 의해 중대를 전진시킬 수 있었고, 적진 한가운데에서 고립되어 후퇴명령을 받았을 때는 오히려 공격으로 적의 허를 찌른 뒤 부하들을 안전하게 독일군 전선으로 귀환시켰다. 곧바로 그에게 1급 철십자훈장이 수여되었고, 이때부터 그가 속한 제124보병연대의 장병들은 “롬멜이 있는 곳이 바로 전선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2차대전 당시 롬멜은 영국인과 미국인이 몽고메리와 패튼의 이름을 알기도 전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일한 독일 장군이었다. 북아프리카에서 그 이름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영국군 오친렉Auchinleck 장군은 병사들에게 “롬멜은 초인이 아니다”라고 말해야 했다. 이런 롬멜의 명성 때문에 몽고메리와 패튼은 실제보다 훨씬 영웅적인 인물이 되어 그를 상대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들의 병사들이 그렇게 과장된 그들의 모습을 믿었기에 롬멜을 이길 수 있었다. 북아프리카에서 롬멜이 고전한 가장 큰 이유는 히틀러와 독일군 최고사령부에 있었다. 총통은 그에게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며 독일아프리카군단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지급될 것”이라 약속했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러 롬멜은 총통의 신임을 잃었고, 그는 전쟁의 패배를 예측하고 협상을 원하게 되었다. 결국 그것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게 된다. 롬멜을 죽임으로써 히틀러는 독일 내에서는 충분한 존경을 받고, 독일 밖으로는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사나이를 없애버렸다.
롬멜, 그는 우리 독일 육군에서 가장 용감한 기갑부대 장군이다.
-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롬멜, 롬멜, 롬멜. 그를 무찌르는 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한가?
-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본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