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는 누구냐니까?”
내가 거듭 묻자 여자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날 첫눈에 알아볼 거라 생각했는데…….”
어둠 때문에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귀에 익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은 스무고개 식으로 그녀가 누군지 알아맞히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성냥을 그어 패서디나의 벼룩시장에서 산 낡은 허리케인 램프에 불을 붙였다.
은은한 불빛이 실내에 퍼져나가면서 여성 침입자의 모습이 보다 명확하게 들어왔다. 나이가 스물다섯쯤 돼 보이는 젊은 여자로 왕방울처럼 큰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하고, 갈색 머리칼에서는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우린 한 번도 만난 적 없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볼 거라 생각했죠?”
그녀가 피식 헛웃음을 흘렸지만 나는 절대로 그런 수작에 말려들 생각이 없었다.
“아가씨, 이제 그만 하시죠. 이 야심한 새벽에 남의 집에서 대체 무슨 짓이죠?”
“정말 모르겠어요? 나란 말이에요, 빌리.” --- p.72
롤과 단둘이 있을 때면 어린 시절 겪었던 혼돈스런 상황이 부메랑처럼 날아와 나를 할퀴고 지나갔다.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의 전부나 다름없었던 맥아더파크의 지저분한 공터들, 우리를 가두었던 그 악취 나는 수렁과 질식할 것 같았던 공기, 학교가 파한 후 철책으로 둘러쳐진 농구장에서 나누었던 고통스러운 대화의 기억들…….
오늘도 나는 우리가 아직 열두 살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백만 부가 팔린 내 소설들, 캐롤이 체포한 수많은 범죄자들은 우리 둘이 맡은 연기에 필요한 소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린 아직도 그 혼돈의 거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사실 우리 셋 다 아이를 낳지 않은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강박증과 싸우기에도 벅차 생명을 잉태해 흔적을 남기겠다는 희망 따위는 품어 볼 틈이 없었다. --- p.112
우리가 알고 지낸 지는 벌써 10년째다. 밀로를 제외하고는 캐롤은 내게 하나밖에 없는 친구다. 캐롤은 미스 밀러 말고 나와 유일하게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이다. 우리 관계는 아주 독특하다. 캐롤은 내게 여동생이나 여자친구 이상의 존재이다. 우리 관계에는 한 마디로뭐라 단정 지을 수 없는 ‘독특한’ 면이 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우리의 관계는 4년 전부터 급격히 달라졌다. 나는 바로 옆집, 내 방에서 불과 1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무시무시한 지옥의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매일 아침 층계에서 마주치는 소녀의 내면에서는 이미 생명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며 끔찍한 수난을 겪어야 하는 숱한 밤들이 있었다. 누군가가 그녀의 피를, 생명을, 수액을 빨아먹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내겐 그녀를 도울 방법이 없었다. 나는 외톨이였으니까. 고작 열여섯 살이던 내게는 돈도, 패거리도, 총도, 탄탄한 근육도 없었다. 가진 거라곤 비교적 잘 돌아가는 머리와 굳은 의지뿐이었는데, 그것만으로는 그녀가 처한 상황을 바꿀 방법이 없었다. --- pp.229~230
“인연이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게 바로 우리 인생이야. 하루아침에 이별을 통보하고, 또 통보 받기도 하지. 우리는 간혹 헤어지는 이유도 모른 채 헤어지기도 해. 다모클레스의 칼이 언제 내 머리 위로 떨어질지 모르는데 내 모든 걸 상대에게 걸 수는 없어. 나는 내 변화무쌍한 감정들을 믿고 내 인생을 설계하고 싶지 않아. 감정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불확실한 것이니까. 당신은 감정이란 믿을만하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방금 옆을 지나치는 여자의 치맛자락에, 그녀의 매혹적인 미소 한 번에 당장 흔들릴 수 있는 게 바로 인간의 감정이야. 내가 음악을 하는 건 왠지 알아? 음악이 내 인생을 버리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야. 책도 영원히 그 자리에 있으니까, 나는 책을 사랑하지. 평생 사랑하는 사람들, 난 그런 사람들을 본 적이 없어.” --- p.259
여자들은 잭의 서로 상반되는 이미지에 홀딱 넘어가 그가 자신에게만 특별 대접을 해준다는 도취에 젖곤 했다. 그러나 일단 정복에 성공하고 나면 잭은 에고이스트적인 본색을 드러냈다. 상대의 마음을 요리하는데 능한 그는 항상 피해자인 척하며 어떤 상황이든 자기 쪽에 유리하게 만들었다. 둘의 관계에 회의감이 들면 모진 말로 애인을 업신여기고 상처를 주어 떼어냈다. 잭은 상대 여자의 약점을 교묘히 찾아내어 자기 손에 넣고 쥐락펴락하는 데는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잭에게 유혹당한 여자들의 가슴에는 언제나 치유할 수 없는 상처만이 남았다. 이제 그런 변태이자 나르시시스트인 잭의 손아귀로 빌리를 돌려보내야 하는 것이었다. 어쩌다 몹쓸 인간을 사랑하게 된 빌리는 언젠가 내게 둘이 함께 삶을 일구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한 적이 있었다.
등장인물의 인성을 하루아침에 바꾸어놓을 수도 없으니, 결과적으로 나는 내가 판 함정에 스스로 빠져드는 꼴이 된 셈이었다. 소설을 쓰는 작가가 신은 아니지 않은가. 픽션에도 나름대로의 법칙이 있게 마련인데, 그 천하의 개망나니 같은 잭을 3권에서 갑자기 훌륭한 사윗감으로 바꿔 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 p.366
“그럼 오늘밤이 우리의 모험을 끝내는 날인가?”
빌리가 짐짓 유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맞습니다. 우리 둘 다 임무 완수를 했으니까. 당신은 소설을 끝냈고, 나는 사랑하는 여자를 당신한테 되찾아주었으니까.”
“이걸 어쩌죠? 이제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당신인데…….”
“제발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아요.”
빌리가 한창 말을 하는데 헤드 웨이터가 주문을 받기 위해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나는 슬픔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내 시선은 파리의 정경이 아래쪽으로 황홀하게 펼쳐지고 있는 아찔한 아트리움 창문 밖을 헤매고 있었다. 웨이터가 주문도 받지 않고, 슬쩍 자리를 피했다.
“아주 구체적으로,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죠?”
“벌써 여러 번 얘기했잖아요, 톰. 당신이 원고를 편집자한테 보내면, 원고를 읽는 순간 편집자의 머릿속에 당신이 이야기를 통해 표현한 상상의 세계가 펼쳐지는 거죠. 그 상상의 세계가 바로 내가 가 있을 곳이에요.”
“당신이 있을 곳은 바로 여기, 내 옆이야.”
“아니, 그건 불가능해요. 난 현실 세계와 픽션의 공간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어요. 난 여기서는 살 수 없다니까요.”
--- p.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