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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고, 지치고, 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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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고, 지치고, 홀린

: 시인 강정이 쓰고 그린 영화들

강정 | 마름모 | 2024년 04월 29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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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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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4년 04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340쪽 | 376g | 130*190*20mm
ISBN13 9791198506573
ISBN10 1198506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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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俳優)란 단어를 풀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뜻이 숨어 있다. 여기서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는 함의를 가진다고 봐도 된다. 자신이 아닌 사람이 되면 자신이 했던 것들이 다르게 보일 거라는 건 물리적으로 명확하다. 그럴 경우, 세계도 변하게 된다. 내가 알고 있던 세계가 ‘그’가 아는 세계가 되고, 내가 나였을 때엔 몰랐거나 무시했던 것들을 새로이 알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이었을 때엔 불가능해 보이던 일들이 가능하게 (여겨지게) 된다. 나를 바꾼다는 건 내가 숨겨뒀거나 감추고자 했던 모종의 진실을 스스로 고발하는 행위인 것이다.
--- p.21 「오늘 나는 나를 버리기로 한다 〈여행자〉」중에서

서두에 전제했듯 사람의 삶이 태생부터 감옥이라면, 사람으로 구성된 사회는 더 큰 감옥의 집합이라 할 수 있다. 알모도바르는 그 감옥을 부수진 못하더라도 자기 의지로 변형시켜 자신의 굴레와 한계를 천국의 도구 삼아 스스로 즐기라고 종용한다. 생물학적 혹은 사회적으로 주어진 성(性)이나 부모마저 스스로 바꿔 비극마저 황홀한 판타지로 재구성하는 일. 그렇듯 세심하고도 엉뚱기발한 심리적 토대를 배제하고 본다면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스페인 특유의 강렬한 색감과 섬세한 소도구들의 진한 물성 말고 별 볼 게 없는 장난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 p.38 「내 몸엔 내가 하나도 없어! 〈내가 사는 피부〉」중에서

삶은, 그리고 사랑은 완전한 실패에 다다르기 위한 노력에 불과할 수도 있다. 실패하고 또 실패하여야 마주할 수 있는 자신의 얼굴을 한없이 그리고 또 지우는 일일 수도 있다. 세상의 많은 예술가들이 그렇게 실패하고 실패하여 결국에 ‘실패의 완성’을 작품으로 남겼다. 사랑은 실패의 가장 훌륭한 오브제이자 본질이다. 실패의 붓이자 실패의 악기이고 실패하기 위한 분투, 그 열정의 불타는 거울이다.
--- pp.95~96 「두 눈 속에 담긴 한 사람 〈북극의 연인들〉」중에서

실존했던 인물을 영화화하면서 그 사람을 실재했던 그대로 똑같이 묘사할 필요는 없다. 모종의 극화와 유별난 특징에 초점을 맞춰 형상화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결국 시인에 대한 영화다. 그런데 영화는 잘 알려진 그들의 에피소드를 삽화 나열하듯 진행된다. 캐릭터와 주제가 아무리 확실하더라도 단순 서사 구조만으로 시적 영혼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오류다. 고흐의 후반생을 건조하나 적나라하게 훑은 모리스 피알라나 너저분하고 비루한 일상에서 우아한 보석을 캐낼 줄 아는 에릭 로메르 같은 감독이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랭보를 열독해버린 쿠엔틴 타란티노가 특유의 엉뚱함과 발칙함으로 만들었으면?
--- p.169 「시인의 영화에 왜 시가 없을까 〈토탈 이클립스〉」중에서

영화 초반에 오펜하이머와 한 동료가 논쟁을 벌이다가 이런 말이 나온다. “폭탄은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구별하지 않는다.” 우주 또한 그러하다. 다만 인간이 인간됨을 사수하고 무고한 이에 대한 폭력을 통제하려고 노력하는 것만이 가능할 뿐인데, 그 역시 때론 선악 구분을 스스로 뭉개기도 한다. 영화는 오펜하이머가 자신을 둘러싼 인물들에 의해 몰락하는 과정을 다룬다. 핵폭탄을 만든 자가 인간이라는 개별적 핵에 의해 고립되고 발가벗겨지는 당착과 모순의 연쇄. 핵폭탄을 담보로 유지되는 현재의 계산된 평화가 개별 인간들의 삶에도 언제나 작용한다.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핵이 한 개인의 가장 작은 핵심으로 쪼그라들었다가 다시 팽창하는 이야기. 우리는 모두 죽음이자 죽임이고, 스스로 인간의 파괴자다.
--- p.230 「선을 위한 파괴는 존재하는가 〈오펜하이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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