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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상] 문명의 배꼽,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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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상] 문명의 배꼽, 그리스

: 인간의 탁월함, 그 근원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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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1월 23일
쪽수, 무게, 크기 450쪽 | 760g | 150*210*30mm
ISBN13 9788901153834
ISBN10 8901153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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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는 지중해의 태양 같은 뜨거운 격정과 말라비틀어진 마른풀 같은 무기력이 공존하고 처음 만난 여행자를 집 안에 들여 재워주는 인류애적인 친절과 백주대낮에 불법체류자를 둘러싸고 돌을 던지는 야만이 공존한다. 더구나 이곳은 한때 유럽 최고의 깍쟁이라 불리던 사람들의 후예가 사는 코린토스가 아닌가! 그러니 이곳에 처음 발을 디딘 이방인에게 이 정도의 당혹감은 충분히 감당해야 할 통과의례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도 당신이 준비되어 있을 때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말이다. --- p. 35

하지만 나는 이 땅 아래에 잠들어 있는 겹겹의 무덤들 속에는 단지 그녀들의 향기 나는 허리띠만 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긴 역사 속에서 이 성채를 지키다 쓰러져간 전사들의 투구와 이곳을 다스리던 지배자의 왕홀들이 함께 묻혀 있음을 알게 됐다. 그리하여 그 한 겹 한 겹의 무덤들 모두에 온전한 그리스 역사의 연대기이자 때로는 용맹하고 때로는 비겁했던 코린토스인들의 전설과 신화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야 했다. --- p. 48

박물관을 빠져나오면 바로 유적지로 이어진다. 물론 이 유적지 역시 순수 혈통은 아니다. 이곳은 한때 고대 코린토스의 아고라였지만 그 위에는 고대 로마의 유적들이 서 있다. 고대 로마는 코린토스를 폐허로 만든 후 다시 재건하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카이사르Caesar가 부하들이 살 땅을 이곳에 마련해주려고 재건을 시작했다고 하지만 코린토스의 지정학적 매력과 환락에 대한 추억이 그곳을 다시 로마식으로 재건하고픈 욕망으로 치환됐을 것이다. 왜 안 그랬겠는가. 이곳이 바로 부와 환락의 상징이자 그리스의 열쇠도시였으니 말이다! --- pp. 78~79

원래 그리스인들이 신전을 세울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입지였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문명은 자연과의 조화를 중히 여겼던 게 틀림없다. 동양의 풍수가 그러한 것처럼 그리스에서도 자연과 인간, 산과 바다의 조화를 제일 먼저 고려했다. 사실 그리스 신전과 로마 신전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이 점이기도 하다. 로마의 신전은 북적이는 시장과 상가 혹은 관공서가 늘어선 광장 어디에나 세워졌지만, 그리스의 신전은 그 입지에서부터 탁월한 조화미를 보여주고 있다. --- p. 87

다음날 아침, 이제 코린토스 전체를 조망하며 천천히 그곳을 돌아볼 차례였다. 내 여정도 그렇듯, 어떤 여행자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들고나는 데 코린토스를 거치지 않을 재간은 없다. 그런 점에서 코린토스는 그리스 여행의 오프닝 무대인 셈이다. 바위투성이인 고대 코린토스의 땅은 번영의 땅이었지만, 운명의 신 모이라Moira의 실타래는 늘 공정하다. 코린토스 땅은 번영의 땅인 동시에 약탈의 땅이기도 했고, 탐욕의 땅인 동시에 몰락의 운명을 품은 땅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코린토스는 진정 고대 그리스의 ‘소돔과 고모라’였으며 스스로 덫에 걸려 몰락해버린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땅이기도 했다. --- p. 119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기 자신을 이상화한 모습을 창조하고, 그것을 닮으려고 노력했다. 육체뿐 아니라 생각, 인식, 용기, 행동, 태도 등 모든 면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망상으로 지은 집이 아니다. 세상에 망상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인간은 없을 테니까. 그들은 성스러움, 고행, 투쟁, 심오한 슬픔 등 전체적으로 볼 때 신비롭지만 성스럽기까지 한 존재를 창조하고 그것을 ‘영웅’이라 불렀다. 나아가 그들 스스로 그 영웅 혹은 영웅의 삶을 닮으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그리스 문명이 발화한 원천이었을 것이다. --- p. 146

‘영웅’은 고대 그리스인들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다. 그들이 말하는 영웅이란 단지 무지막지한 힘으로 전공을 세운 이를 뜻하지 않는다. 더욱이 돈을 많이 벌거나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을 쥔 자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러한 것들이 영웅의 조건이었다면 오늘 이 순간에도 세상은 영웅으로 차고 넘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때로는 야만적이고 때로는 소아적이며 힘만 센 ‘무식한 장사’의 전설로 가득한 신화 속의 헤라클레스를 온전한 영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딘가 모순에 찬 듯하다. --- p. 151

고대 그리스인들만큼 운동경기를 사랑한 민족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전쟁을 하다가도, 들판에서 노동을 하다가도 중간중간 육체를 단련했으며 서로 겨루기를 좋아했다. 그들에게 운동경기는 예술과 철학, 비극만큼이나 인간을 표현하는 훌륭한 수단이었고, 경기장은 그 무대였다. --- p. 228

진흙을 많이 빨아먹을수록 꽃은 더욱 아름답게 피어나는 법이다. 머릿속에서 그의 말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고대의 그리스인들은 척박한 땅에서 거친 투쟁을 거치면서도 죽음 대신 삶을 생각했고 본능적인 두려움과 맞서면서도 노예의 길이 아닌 자유인의 길을 걸었다. 심지어는 수백 년간 이어진 도시 간의 내전도 페르시아와 맞선 범그리스인들의 투쟁도 오름길을 걷는 걸음이었으며 그 오름길에서 사물을 보고 이해하고 느끼고 표현한 결과였다. --- p. 234

잔 바닥에 가루가 가라앉는 그리스식 커피를 주문하고, 카페 안에 자리를 잡자 사방에서 질문이 빗발쳤다. 어디서 왔느냐, 왜 왔느냐, 우리 마을에 외국인이 온 건 정말 오랜만이다, 정교회 신자냐, 등등 한동안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 커피를 마시기 힘들 정도였다. 누군가는 그리스 사람들이 무뚝뚝하다지만 내가 경험한 바로는 그 반대였다. 그리스 사람들은 낯선 사람과의 대화를 참 좋아하는 듯했다. 언어도 아름답고 억양도 독특하며, 게다가 열정적이기까지 해서 말을 할 때는 손짓 발짓, 어깨와 머릿짓까지 총동원하는 사람들이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먼저 내게 말을 걸자, ‘나도 할 수 있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이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그렇게 한두 사람과 말을 주고받다가 급기야 카페 안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우러져 왁자지껄 즐거운 수다마당이 펼쳐졌다. 부활 마지막 주일 아침, 이 작은 산골동네가 부활이나 한 듯 활기가 흘러넘쳤다. --- p. 253

하지만 유효기간이 지난 신에겐 아우라가 없다. 기적의 현현顯現이라 여기며 충격적인 감동에 빠졌던 나는 금세 관찰자의 눈으로 돌아와 신전 주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기둥을 만져보고 바닥에 드러눕고 기둥 뒤에 숨었다가 계단과 계단을 뛰어다니며 아폴론에게 장난을 걸었다. 교만한 니오베의 아들딸을 죽음의 화살로 쏘아 날린 그 ‘포이보스’에게 감히 말이다. --- p. 266

그들은 현실적이었고 신을 숭배했으되 무조건 따르지는 않았다. 신이 정해준 운명에 끝없이 도전하며 스스로가 신의 반열에 오르길 목숨을 걸 만큼 간절히 바랐다. 그 결과 그리스의 많은 영웅들은 마침내 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인간이 곧 신이었고, 신이 곧 인간이었다. 이렇게 사상과 종교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그리스인들은 일찌감치 인간에 눈을 떴던 최초의 인간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탁월함’이라 불렀다. --- p. 316

코린토스는 다양성은 있었지만 그 내용이 문란하여 창조적 긴장이 발아하지 못했고 스파르타는 진중했으나 획일성이라는 척박한 토양을 취했기에 문명의 씨앗이 잉태될 수 없었다. 더구나 스파르타인들은 자신들이 정복하거나 이웃한 이들과 어울려 문화의 이종교배를 이루기보다는 이들을 억압하고 순혈주의를 강조함으로써 문화의 동종교배에만 만족하여 더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 p. 360

탁월한 장인의 솜씨라기에는 뭔가 거칠고 부족한 듯하지만 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스파르타 전사의 모습은 힘과 용맹으로 가득한 전사의 그것이 아니다. 목숨을 초개처럼 던질 수 있는 용기의 이면에 누군가의 아들 혹은 누군가의 남편인 이들 전사는 여느 인간처럼 죽음을 앞에 두고 번민과 갈등을 겪어야 했던 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스파르타 전사상에는 바로 이런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표정한 듯이 보이지만,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아스피스를 치켜든 그의 왼팔은 다음 순간 자신에게 죽음의 칼날이 내리칠 것이라는 비극적 운명을 깨달은 자의 그것이다. --- p. 405

물론 후세 역사가들은 식량을 얻기 위해 흑해 너머로 선단을 보내야 했던 그리스인들이 흑해 입구에서 비싼 통행료를 받는 트로이를 공격할 명분으로 헬레네 이야기를 지어냈을 것으로 믿는다. 따라서 이들은 헬레네가 자발적으로 이집트를 방문했을 뿐 헬레네가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이야 어찌 되었든 트로이를 공격한 원한은 정화되지 않은 채 수천 년의 분쟁을 이어갈 엄청난 사건으로 잠복해 있는 것이 분명하고, 헬레네와 파리스의 낭만은 진정한 낭만이 아닌 것 또한 분명하다. 나비효과처럼 작은 사건이 불씨를 퍼트리며 그 불이 온 산을 불태웠으니, 사람이건 국가건 원한이란 결국 복수의 여신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어리석은 일임을 보여주는 섬뜩한 교훈이다.
--- pp. 426~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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