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평곽의 성문이 열리고, 단 한 기의 인마가 넓은 성문을 통과하여 모용인의 앞으로 다가왔다. 온통 뒤집어쓴 흙먼지에도 아랑곳 않고 아영은 이마께에 흐르는 땀을 닦고는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그대로 모용인을 내려다보았다.
“고구려의 원군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어리둥절하여 묻는 모용인에게 아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고구려의 원군이다.”
“예?”
“내가 바로 십만 군사이며, 모용황의 숨통을 끊을 칼이다.”
아영의 형형한 눈빛을 마주한 모용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 허황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 평생 들어온 어떤 말보다 그를 강하게 전율시킨 까닭이었다.---p.78
“부왕께서 그리도 틀리셨나요?”
돌연한 물음에 놀란 왕후는 아들을 깊숙이 바라보았다. 작게나마 일그러진 구부의 표정으로 보건대 필시 제 아비를 비난하는 말을 들었음에 틀림없으리라. 안타까운 기운이 왕후의 고운 얼굴을 몇 번이나 스쳤다. 언제고 자신에게 던져질 질문인 줄은 알았건만 마땅한 대답을 준비하지는 못한 터였다.
“누군가 폐하를 욕하더냐?”
구부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기다려도 말이 없자 왕후는 다시 천천히 물었다.
“너는 폐하를 어찌 생각하느냐?”
“그게…….”
“편히 말해보거라.”
“전쟁은 서로 번갈아 따귀를 때리는 일과 비슷해요. 어느 한쪽이 맞고 그만두어야 끝나는 거지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때린 뒤 그만두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맞고 끝내려는 거예요. 즉 사람들은 거짓으로 전쟁을 끝내려 하고, 아버지는 참으로 전쟁을 끝내려 하시는 거예요.” ---pp.145~146
“내 추한 어미가 싫었소. 나를 버린 당신이 싫었소. 나를 동정하는 사신장이 싫었고, 나를 구제한 원목중걸이 싫었소. 내 잘난 형제들이 싫었고, 점잔을 빼는 신하들이 싫었소. 죽은 당신을 잊지 못하는 백성들이 싫었소. 고구려를 이기지 못하는 장수와 병사가 싫었소. 마치 내가 모자란 것 같아 싫었소. 모두가 싫었소. 내 삶은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싫은 것투성이였소.”
잠시 말을 멈춘 그는 묵묵히 모용외의 봉분을 바라보다 박힌 돌덩이 하나를 뽑아내며 말을 이었다.
“좋은 것이 갖고 싶었소. 당신의 소원대로 고구려를 부수고 천하를 얻고 싶었소. 그리하면 당신도, 신하도, 백성도 모두가 나를 좋아할 것이라, 그 싫은 모든 것이 좋은 것이 되리라 믿었소.” ---p.206
“왕이란 흥미로운 사람이어야 한다. 흥미로운 사람만이 매력적인 법이고, 매력적인 사람만이 신하와 백성을 뿌리에서부터 휘어잡으니까.”
“…….”
“나, 연나라의 황제 모용황이 명하노니, 연나라 군사는 저길 넘는다.”
모용한은 모용황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보고 다물었던 입을 벌렸다. 젖혀진 막사의 문틈 너머로 내다보이는 그곳에는 신성을 고구려의 대문이라 불리게 한 거대한 벽,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산맥이 어둑하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산을 타고 넘는 일을 밥 먹듯 하는 심마니들조차 함부로 들어서길 저어한다는 깊고 깊은 산세가 마치 넘을 테면 넘어보라는 듯 당당히 버티고 서 있었다.
“폐하, 아군의 군세가 육만이 넘습니다. 그만한 대군이 어찌 저 산맥을 타란 말씀이십니까.”
당연한 말이었다. 다치고 지쳐 낙오하는 이가 태반일 것이었고, 설령 넘는다 하여도 이후에 보급을 받을 방도는커녕 후퇴하여 돌아갈 길조차 차단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용황은 도로 눈을 감아버릴 뿐이었다.
“적도 너와 같은 생각이겠지.”
“하지만…….”
“전쟁의 승패란 장담할 수 없는 일이나, 산은 넘고자 하면 반드시 넘어지는 것이다.”---pp.233~234
“내 농부와 소를 본 적이 있다. 농부는 이미 죽어 있었고 소는 피골이 상접한 것이 오래간 굶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대로 두면 소가 죽고 말 것 같아 몇 번이나 회초리로 때려 몰았는데, 이놈은 결코 농부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너는 그 소가 왜 그러했는지 알 것 같으냐?”
이야기를 다 들은 밭주인은 무어 그런 것을 묻느냐는 듯 뚱한 눈초리로 구부를 보았다.
“정말 그것을 모르시겠습니까?”
그러고는 구부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피식 웃으며 답했다.
“밭을 갈아줄 농부가 죽었잖습니까. 소는 밭을 갈아야 먹을 것이 생기는 법인데 농부가 죽었으니 누가 함께 밭을 갈아줍니까. 제 밭을 갈도록 씨를 뿌려줄 농부가, 수확을 하여 여물을 먹여줄 농부가 죽었으니 어쩌겠습니까. 밭을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밭주인의 이야기를 듣던 구부는 언제부터인가 얼어버린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이를 본 밭주인은 손을 들어 몇 번 그의 눈앞을 휘휘 저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러니까 소에게는, 소에게는 농부가 제 일꾼이었다는 말이냐?”
“물론입죠. 인간이야 소가 일꾼이라 생각하겠지만, 어디 소도 그리 생각하겠습니까.”
---pp.32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