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과정설: 지질 변화가 현재나 과거나 동일하다
프랑스의 계몽주의적 사고의 역사과학이 영국으로 넘어가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특히 지질학 분야에서 런던지질학회(1807년)가 처음 설립된 것이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당시 설립 회원 13명은 지질학 분야에 거의 지식이 없었지만 모두 막연하게 오랜 역사 이론을 믿었으므로, 같은 사고를 하는 지질학자들에게 더 많은 연구 지원을 했다. 영국은 프랑스보다 계몽주의가 늦게 시작되었지만, 런던지질학회 설립 덕분에 역사과학 분야에서는 프랑스보다 훨씬 발 빠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지질학이 역사과학에 강한 동력을 불어넣는 계기를 마련했다. 1830년 당시 변호사였던 라이엘(Charles Lyell, 영국, 1797~1875)이 《지질학 원리》(Principles of Geology)를 출간한 것이다. 그의 책은 기존 계몽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등장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역사과학 분야에 계몽주의적 접근을 부채질하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그런 면에서 라이엘의 책에 관한 이해는 앞으로 다룰 성경 역사와 진화 역사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라이엘은 책을 통해서 “°현재는 과거를 알 수 있는 열쇠”±라는 명제를 보편화시켰다. 근대 지질학의 슬로건과 같은 이 한 문장은 라이엘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는 책 전반에 걸쳐 이 자세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그의 자세를 좇는 지질학자들이 나중에 이 문장으로 축약하여 사용하였다.
풀어서 말하자면, 오늘날 일어나는 지질 과정의 현상을 역추적하면 과거 지구의 시작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 일어나지 않는 어떤 특별한 자연과정이 과거 지구상에 일어났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침식이나 퇴적 같은 지질 변화가 아주 느리게 나타나므로 과거에도 동일하게 아주 느리게 일어났을 것으로 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가설을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이라 한다.
동일과정설은 창세기 1장의 초자연적인 창조와 홍수 심판 같은 전 지구적인 격변 사건이 발생했을 리 없다는 생각을 심어 주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계몽주의 사고의 연장선에서 등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우리 자신이 과거에 그 현장에 없었지만, 현재 자신의 이성과 경험으로 과거를 알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그런 면에서 라이엘의 사고는 데카르트가 ‘존재케 하신 하나님’보다 ‘자기 이성’을 우선시한 것과 일백상통한다. 그러나 이는 역사과학 에 대하여 접근 순서를 역전시킨 현실과 동떨어진 자세이다. 왜냐하면 과거 사건은 그 현장에 있었던 ‘증인’을 통해 아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살인 사건 현장을 찾은 형사는 증인을 배제한 채 사건을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현장에서 가장 먼저 찾는 것은 바로 증인이다. 어떤 형사도 “°증인은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라이엘이 대중화시킨 “°현재는 과거를 알 수 있는 열쇠”±라는 말은 현장에 있던 증인을 배제해도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는 현실과 동떨어진 주장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제는 “°거기 계셨던 하나님”±(증인)이 계시하신 성경을 참고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불어넣었으며, 이성을 중시하는 계몽주의적 근대 사고와 맞물려 지질학의 명제가 되어 버렸다. 그의 해석이 과학적 탐구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의 시도는 다분히 자기 이성을 우선시하는 철학적 분위기의 연장선일 뿐이었다. 이렇게 현실과 동떨어진 발상임에도 불구하고 라이엘의 동일과정설적 사고에 입각해서 지구의 과거를 해석하기 시작한 시기를 현대지질학의 시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 초판이 출판된 후, 동일과정설이 보편화되자 19세기 중반을 넘기며 대부분 지질학자들은 지구가 깎이고 깎이는 오랜 침식 과정과 쌓이고 쌓이는 무수한 퇴적 과정을 겪었으리라는 시각에서 지형을 바라봤다. 동일과정설의 패러다임(사고의 틀)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지질학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과학 실험을 거의 수행하지 않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산과 지층을 바라보며 실험을 통하지 않고 자신의 패러다임으로만 ‘해석’했다. 그런 해석이 점차 널리 퍼지면서 지구의 역사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막연한 과정을 반복했으리라는 생각이 보편화되어 갔다.
결국, 사람들은 태초에 창조된 세상은 처음부터 완전했으며 홍수 심판이라는 대격변이 있었다고 하는 성경 기록에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19세기에 시작된 이런 사고는 20세기를 넘어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지질학자를 비롯한 현대인에게 영향을 주어 이런 패러다임 속에서 지구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 p.28-31
성경 역사를 진화론과 타협하려는 시도는 대부분 진화론적 사고와 마찬가지로 계몽주의와 함께 시작되었지만, 지질시대표가 만들어진 후에야 비로소 대중적으로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새로운 사상이 시작되는 시점이 있는가 하면, 대중화되는 시점이 있다. 지질시대표와 타협이론은 역사의 등장 시점에 약간 차이가 있지만, 지질시대표가 타협이론을 대중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지질시대표가 만들어지고 과학 교과서에 실리게 되자 가장 당황한 곳이 어디였을까? 바로 교회였다. 성경과 전혀 다른 역사를 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이 하나님을 믿는 근거는 성경인데, 학교에서 성경을 부정하는 내용을 진리로 가르치게 된 것이다. 이때 교회는 어떻게 했을까?
많은 교회에서 지질시대가 왜 그릇된 역사인지를 대답해 주는 대신에 오히려 수십억 년 지구와 진화론을 진짜 역사로 놓고 성경을 수정하려는 태도를 취했다. 몇몇 신학자와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발 빠르게 작업하기 시작했다. 이 같이 과거 역사를 지질시대 이론과 성경을 섞어 설명하는 이론을 타협이론(Compromise theory)이라 한다.
그동안 시도되었던 모든 타협이론은 진화 역사를 사실로 놓은, 즉 진화론에 대한 신뢰에서 등장했기 때문에 진화론이 수정됨에 따라 그 내용도 함께 바뀌어 갔다. 또한 진화론에서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내용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타협이론 역시 다양해졌다. 예를 들어, 단순한 생물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진화의 전 메커니즘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극단적인 유신론적 진화론에서부터 하나님이 진화를 허용하시지는 않았지만 진화 역사는 인정하는, 즉 하나님이 지질시대표 순서대로 창조하셨다고 주장하는 점진적 창조론과 오랜 연대를 성경의 어느 한 부분에 끼워 넣으려고 시도하는 간격이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타협이론의 종류별 변천사를 간단하게 소개한다.
유신론적 진화론: 하나님이 진화 과정을 사용하셨다
진화론과 지질시대표가 등장했을 때, 가장 먼저 확산된 타협이론은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이다. 여기서 확산되었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지질시대표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유신론적 진화론의 시도가 있었지만, 이것이 보편화된 것은 지질시대표가 만들어진 무렵이기 때문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단어 자체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神)과 진화론을 합성한 용어다. 즉 “°하나님이 생물과 인간을 창조하실 때 지질시대표 순서대로 수십억 년에 걸쳐 진화 과정을 사용하셨다”±는 말로 간단히 정의할 수 있다. 유신론적 진화론이라는 용어는 넓은 의미로는 진화론과 타협한 모든 이론에 적용되지만, 좁은 의미로는 진화 역사가 인간과 생물의 역사일 뿐 아니라 진화 메커니즘까지도 그대로 인정하는 타협이론에 적용된다.
--- p.51-53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은 선하시므로 그분 안에는 불변의 성품과 상반되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지으신 피조물에도 흠이 있을 수 없다. 모든 피조물이 처음부터 설계된 그대로 선하게 기능한다. 그래서 창조할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반복하신 것이다.
성경에 하나님과 관련하여 “°선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단어가 500회 이상 등장한다. 창조의 마지막인 사람을 지으신 후에는 “°심히 좋았다”±(very good, NASB)고 선언하셨다. 이는 정말로 피조물들이 주님의 성품에 맞게 기능하고 있음을 말한다. 모든 무생물의 분자와 각 생물의 기관들이 흠 없이 완벽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3장에 기록된 사람의 범죄 이전에는 주님의 성품과 상반되는 어떤 결함이나 죽음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런 언급조차 없다.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시 25:8)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
창조자이며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로 부르셨다(요 10장). 하나님의 성품에 선하지 않은 부분은 한 군데도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은 창조할 때마다 ‘보기에 좋다’고 반복하셨다. 자신의 중요한 성품을 드러내신 것이다. 이 같이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흠 없이 선하심을 명백하게 드러냈다.
그런데 타협이론 지지자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심각하게 손상시킨다. 그들이 실제 역사로 여기는 지질시대표는 인간이 죄를 짓기도 전에 이미 수많은 경쟁, 멸종, 피 흘림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런 모습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그분의 성품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피조물이 고통을 겪는 것은 우리 죄악 때문이며, 그 죄가 해결되고 완전히 회복될 미래를 바라보며 참는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롬 8:22~25).
--- p.77-78
저자는 과학적 증거들을 통해 성경이 역사적 사실임을 주장하는 창조과학 사역을 비판한다. 극단적인 유신론적 진화론을 주장하는 저자는 창조과학자들을 비판하는 데 한 단원을 할애했을 뿐 아니라 곳곳에서 비판을 이어 갔다.
비판의 목적은 분명하다. 창조과학자들을 비판함으로써 성경을 그대로 믿는 자세를 비판하려는 것이 그의 의도다. 그런 면에서 저자의 비판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본다.
창조과학자들이 과학을 비판한다는 주장
앞서 지적했듯이 저자는 ‘진화론=과학’이라는 그릇된 용어 사용으로 창조과학자들을 비판한다. 여기서 ‘진화론’ 대신 ‘과학’을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창조과학자들에 관한 잘못된 편견을 심어 준다.
창조과학자들은 ‘과학’이 틀렸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증거와 방법들을 통해 얻어진 결과들이 ‘진화론’과 조화를 이루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쉽게 말하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나 화석에서 전이 형태가 발견되지 않았고, 생물을 교배할 수 있는 범위, 즉 종, 속, 과, 목 등 씨를 보존할 수 있는 한계인 ‘종류’별로 묶을 수 있으며(창 1:11, 창9:3), 돌연변이나 자연선택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은 종류가 바뀌는 현상을 관찰하거나 실험에 성공한 예가 없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진화론이 과학적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창조과학자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생물을 창조하실 때 ‘종류대로’라는 방식을 사용하신 것이 증거와 잘 맞아떨어짐을 보여 준다. 또한 대륙을 횡단하는 두꺼운 지층과 그 안에 매몰된 화석들을 보며 성경에 기록된 홍수 심판의 증거를 보여 주기도 한다. 즉 창조과학자들은 과학이 아닌 진화론이 틀렸음을 보여 준다.
--- p.157-158
유신론적 진화론, 점진적 창조론, 다중격변설, 간격이론 등 타협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너무나 많은 것을 더했다. 그러면 거짓말이다. 타협이론을 만든 동기가 어떠했든지, 모르고 했든지, 그것이 더 지혜롭다고 생각했든지, 혹은 자신들의 이론을 받아들여야 다음 세대를 교회에 남겨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든지, 그들의 모든 시도는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이 만든 타협이론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너무 많은 것을 더하고 뺐기 때문에,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어리석은 것이었으며 결국 다음 세대를 교회에서 떠나게 하였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면, 예수님도 우리를 부끄러워하신다고 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8)
그런 면에서 타협이론은 진화론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타협이론은 교회 밖이 아닌 성경을 맡은 ‘교회 안에서’ 성경이 틀렸다고 말하며 그 말씀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타협이론은 진화론 자체가 담고 있는 과학적 문제점만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 역사를 진화 역사로 바꾸어 놓는 무서운 오류를 끌고 들어온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타협이론은 필연적으로 성경 역사를 바꾸어 복음을 왜곡시킨다. 타협이론을 따르면 이런 모순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창세기는 옛날 전설이나 시로 전락하고 만다.
--- p.205-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