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131
트레이닝 하의 위에다 종이 기저귀를 찬,
그 당치도 않은 모습으로 어머니가
뒤뚱거리며 재우에게 다가왔다.
'힘들지 마. 내가 살려줄게.'
P 235
'어머니가 직접 사오세요.'
'못해.'
'할수 있어요. 재우가 보고 있을 거니까,
안심하고 가서 사오세요.'
어머니는 쭈뼛거리며 연신 뒤를 돌아보며 노파에게 다가갔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재우는 생각했다.
이젠 이것저것 어머니 혼자서 해야 될 거예요.
제대로 못하면 구박도 받고,
싫은 소리도 듣게 되겠죠.
앞으로는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더 많이 만들어요.
그래야 구박도 안 받고
싫은 소리도 듣지 않게 될 테니까요.
어머니는 양손에 옥수수를 나눠 들고 왔다.
'거봐요, 할수 있죠?'
'할수 있어.'
'앞으로도 잘할 수 있죠?'
'잘할 수 있어.'
--- p.131 ---p.235
정 소장의 목소리가 등을 넘어왔다.
' 그만 가세. 내일은 물때가 좋아서 고기깨나 들 거니까, 자네가 고생 좀 할 거야.'
재우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 순간 등대가 어스름의 바다 위에 기나긴 빛을 던지기 시작했다.
재우는 등탑으로 시선을 서서히 옮겼다. 어머니는 여전히 등실 유리창에 기대선 채 재우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아들이 등대지기면 엄마도 절반은 등대지기라는 말 생각나요? 그런데 엄마 혼자서 구명도 등대를 다 차지하고 있군요. 잘됐어요, 잘됐어요. 이제부터는 엄마가 재우의 등대지기인 거예요.'
--- 에필로그 중에서
재우는 팔짱을 풀고 등을 곧추세웠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게 좋겠어."
누구도 선뜻 대꾸하지 않았다. 침묵속에서 형은 당황하는 기색이었고, 누나는 어이없다는 듯 외면했으며, 형수는 낙담한 표정이었다. 기나긴 침묵이 흐른뒤 마침내 형이 입을 열었다.
"다른 방법은 없으니까 네게 부탁하는 거 아니겠냐."
"어머니를 모시고 갈 수는 없는거야?여기나 뉴욕이나 갇혀 지내는 건 마찬가지일 텐데, 가능하잖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난 여행이 아니라 전쟁을 하러 가는 거다. 낯선 땅에서 목숨을 걸고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회사에서 허락하지 않는 일이다."
회사를 그만두지 그래? 아니면 형수를 어머니 곁에 남기고 형만 떠났다 돌아오든지? 형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대고 있는 듯해 재우는 묻지 않았다. 대신 누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누나가 어머니를 모시면 어때?"
"여자는 출가외인이다. 그리고 아들이 둘씩이나 되는데, 시집간 딸한테 엄마를 떠맡기려 드는 생각 자체가 우습구나."
누나다운 발언이었다. 누나의 냉정함은 예전에도 진저리쳐지도록 겪었으므로 재우는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누나는 5년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단 한푼도 가족을 위해 내놓지 않았다. 결혼 자금을 마련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러나 결국 혼사를 앞두고 뻔한 처지의 살림살이를 더더욱 알량하게 만들었던 누나다. 누나와는 이미 이야기를 끝낸 듯 형은 다시 재우에게 매달렸다.
"만일 내가 결혼이라도 했다면 다른 방법을 찾았을 거다. 장남도 아니면서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신다면 좋아할 며느리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하지만 당장은 홀몸이잖니. 또 네가 있다는 섬이 어머니 모시기에는 한결 수월할 듯싶다."
"무슨 근거로 하는 말이지?"
--- pp.54-55
'이 전화번호는 확실한 거죠? 실종자를 어렵사리 찾아내 연락을 취해보면 엉터리 전화번호인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왜죠?'
'처음부터 찾을 생각은 없었던 거라고 봐야죠. 막상 집을 나간 부모를 모른 척하자니 양심에 찔려 신고만 해두는 거죠. 이 정도 했으면 됐다, 뭐 그런 식의 자기 위안이라고나 할까요.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는 끝까지 찾아나섭니다. 미친 사람처럼 생업도 버리고 전국을 떠돌죠. 그러나 자식이 부모 찾는 경우는 그렇지 않아요.'
--- pp. 237-238
우리네 삶이란 어느 길을 가려 걷는 뭐 그리 유별 날까. 어떠한 삶이든 기쁨과 애달픔과 안타까움과 간절함 따위가 뒤섞인 채로 존재하리라. 때로는 넘어져 무릎이 깨지기도 하고, 때론 골짜기를 빠져나가는 계곡의 물처럼 거침없이 흘러가기도 하는 것이 인생일테지.또 삶이란 어떻게 살아가야겠다는 각오와 맹세에서 얼마나 자주, 얼마나 멀리 비켜나가는가. 그러면서 결국 어찌어찌 살아지는것이 아닐까.
--- p.9
오랜만에 눈을 뜬 어머니는 누운 채로 힘겹게 속옷을 벗으려 들었다.재우는 어머니를 말리고 싶었다. 임종을 앞둔 노인네들이 하루에도 수차례 속옷을 갈아입는다고 했다.그런데 무슨까닭에 속옷마저 벗어내려는가. 어머니는 끝내 솟옷을 벗었고,그 속옷에 바닥에 고인 빗물을 적셔 재우의 입가에 댓다.
'난 이제 됐어요.엄마 차례예요'
그러나 어머니는 속옷을 당신의 입술로 가져가지 않았다.팔을 움직일 만한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 재우 쪽으로 마냥 손을 내민채였다. 어머니의 눈꺼풀이 힘없이 닫혔다.
'엄마.... 사랑해요.'
--- p.301
'엄마....사랑해요'
서른 두해를 살아오면서 재우는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태연하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살과 뼈를 내주며 삼남매를 키웠다. 하지만 어머니는 삼남매 누구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재우가 엄마를 사랑하는거 처음부터 알고 있었죠?'
어머니의 얼굴에 고요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그 미소는 옅어지지도 더 깊어지지도 않은채로 있었다. 반짝, 어머니의 얼굴 위로 구름을 벗어난 태양이 햇살을 드리웠다. 재우는 속옷을 움켜쥐고 있는 어머니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빠르게 어머니의 손등은 온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 p.302-303
'어머니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어머니는 어쩌면 나에게, 당신을 증오하는 자식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병든 몸을 이끌고 구명도까지 오게 된 거라는 생각이 들어......알아, 알고 있어. 어머니가 온전한 생각을 하지 못하지만, 그건 이미 중요하지 않아......나에게 마지막 기회야.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아......'
--- p.246
어머니를 위해서 두번째 산 반지였다. 회갑을 앞두고 마련했던 반지는 되팔아 술을 마셨다. 어머니의 존재를 깡그리 잊으마 다짐하며 마신 술이었다. 그리고 두번째 반지 때문에 어머니를 잃었다. 딱 한 번만이라도 어머니 손에 반지를 끼워드릴 수만 있다면...
--- pp. 240-241
'아들이 등대지기면 엄마도 절반은 등대지기라는 말 생각나요? 그런데 엄마 혼자서 구명도 등대를 다 차지하고 있군요. 잘됐어요,잘됐어요.이제부터는 엄마가 재우의 등대지기인 거예요.'
--- p.309
다만 재우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네 삶이란 어느 길을 가려 걷는 뭐 그리 유별 날까. 어떠한 삶이든 기쁨과 애달픔과 안타까움과 간절함 따위가 뒤섞인 채로 존재하리라. 때로는 넘어져 무릎이 깨지기도 하고, 때론 골짜기를 빠져나가는 계곡의 물처럼 거침없이 흘러가기도 하는 것이 인생일테지.또 삶이란 어떻게 살아가야겠다는 각오와 맹세에서 얼마나 자주, 얼마나 멀리 비켜나가는가. 그러면서 결국 어찌어찌 살아지는것이 아닐까.
--- p.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