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가 자신을 일컬어 피뢰침이라고 말했을 때, 나는 불현듯 서글펐다. 어두운 대기, 빠르게 모여드는 구름, 눈에서 불이 튀는 사람들, 거세게 흘러가는 강물, 그리고 내가 있고 생에 다섯 번째의 전격을 기다리는 J가 있다. 나는 J의 눈을 보았다. 엄마와 아빠 사이로 웅크리고 기어드는 열 다섯의 내가 보인다.
--- pp. 144~145
지난해 펴낸 장편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때문에 가끔 이상한 전화나 편지를 받을 때가 있다. 그 소설에는 자살 안내라는 좀 특이한 일을 하는 사람이 화자로 등장하는데, 독자들 중에는 작가인 나와 그 자살 안내인을 같은 사람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대뜸 전화를 걸어와서는 자신이 지금 자살을 하려고 하는 데 뭐 해줄 말이 없느냐는 식이다. 오죽하면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그러겠는가 싶어 안쓰럽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난감한 노릇이다.
--- p.
좆같은 새끼들아, 이렇게 속으로 욕을 해대면서도 내발은 계속 지붕에서 지붕으로 넘어다녔다. '다행이 타넘을 지붕은 얼마든지 있었다.' 니미 씨팔이다.
--- <비상구> p.187
작가후기
담배같은 소설을 쓰고 싶었다. 유독하고 매캐한, 조금은 중독성이 있는, 읽는 자들의 기관지로 빨려들어가 그들의 기도와 페와 뇌에 들러붙어 기억력을 감퇴시키고 호흡을 곤란하게 하며 다소는 몽롱하게 만든 후, 탈색한 채로 뱉어져 주위에 피해를 끼치는, 그런 소설을 쓸 수 있기를, 나는 바랐다. 두번째 소설집을 묶는 지금 좀더 독해지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 p.285
'세상의 모든 흡혈귀들은 거세당했다. 세상은 빛으로 가득하다. 어디에도 숨을 곳은 없다. 우리는 흡혈의 자유와 반역의 재능을 헌납당했고 대신 생존의 굴욕만을 넘겨받았다....' -흡혈귀 中
'전 달이에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어요. 차를 타고 달리면 차의 속도로, 비행기를 타고 가면 비행기의 속도로 함께가지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中
'어머니와 아내는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그럼 다음달에 내야 할 중도금하고 자동차 할부금은 어떡해? 아내는 그렇게 말했고 어머니도 비슷했다...(중략)..아무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고 말걸지 않았다. 그런날들이 계속, 계속되었다. 바로 오늘까지.'
-고압선 中
--- p.71, p.200, p.236-238 中에서..
살인사건은 왜 일요일에 자주 발생하는 것일까. 글세 정확한 통계야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 경우엔 그랬다. 월요일. 그것도 비번인 날에 자주 터진다. 집에서 쉬고 있다가 불려나가서 더 그런 느낌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 사건도 일요일에 터졌다. 아내와 함께 교회에 나가 지루한 설교를 듣고 있는데 삐삐가 왔다. 빌어먹을. 과장이었다. 호출기에는 과장의 고유번호 3143과 살인사건 코드 01이 함께 찍혀 있었다. 과장은 그런 식으로 삐삐의 집단 호출 기능을 이요해 수사관들을 불러들인다. 강도는 02, 강간은 02, 그외의 사건은 모두 04이다. '들어가봐야겠어. 사건이야.'
--- p. 11
살다 보면 이상한 날이 있다. 그런 날은 아침부터 어쩐지 모든 일이 뒤틀려간다는 느낌이 든다.그리고 하루종일 평생 한 번 일어날까말까 한 일들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하나씩 하나씩 찾아온다. 내겐 오늘이 그랬다. 아침에 면도를 하는데 면도기가 부러졌다. 별로 힘도 주지 않았다는 목이 툭, 하고 꺾여버렸다. 일회용 면도기였느냐고? 물론 아니다. 질레트사에서 최근에 내놓은, 값이 거의 육천 원에 육박하는 제품이다. 튼튼하기가 이를 데 없고 누군가 일부러 부러뜨릴래야 부러뜨릴 수 없는 것인데, 사용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면도기가 부러지는 바람에 수염은 반밖에 깎을 수 없었다. 왼쪽 얼굴은 말끔, 오른쪽 얼굴은 그 반대였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출근해야 하다니, 나는 기분을 잡쳐버렸다. 시계를 보았다. 일곱시 사십분, 여유가 없었다. 머리를 말리고 옷을 걸치고 집을 나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엘리베이터는 오지 않았다. 고장이라도 난 모양이었다. 다시 시계를 보았다. 일곱시 오십오분. 나는 15층에서 1층을 향해 중국집 배달원처럼 달려 내려갔다. 5층을 지나가면서 보니 엘리베이터는 문이 열린 채로 6층과 5층 사이에 걸쳐 있었고 엘리베이터 아래로 사람의 다리 두 개가 대롱거리고 있었다. 한쪽 발은 신발이 벗겨져 있었다.
죽었을까 살았을까. 그때 내 앞으로 위층에 사는 사람들이 바삐 나를 밀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말쑥한 신사복을 차려입은 그들은 출근중이었다.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끼여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저렇게 무심히 지나치다니. 하지만 나 역시 할 수 있는 일을 별로 없었다. 시계를 보았다. 여덟시 정각. 이크. 나는 슬쩍 아래층 쪽을 내려다보면서 갈등했다. 할 수 없군. 나는 신발이 벗겨진 발을 살짝 당겨보았다(발은 내 얼굴 높이에 있었다). 여보세요. 발가락이 꿈틀거렸다. 말이라고 할 수 없는 신음도 흘러나왔다. 살아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를 구해낼 힘도 시간도 없었다. 이거 봐요. 어쩌다 엘리베이터에 끼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출근하면서 119에 신고해줄게요. 아니면 아래층 경비에게 말해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 pp.101-1022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잘 권리가 있다. 나는 오래도록 독신으로 살아왔다. 세상의 소음과 빛이 싫었을 뿐이다. 저곳은 아늑하고 편안하다. 그뿐이다. 당신이 나를 흡혈귀라고 믿는 건 당신의 자유다. 당신의 오해를 교정하려면 나는 죽는 수 밖에 없다. 아니면 당신을 흡혈귀로 만들던가. 세상의 모든 흡혈귀들은 거세당했다. 세상은 빛으로 가득하다. 어디에도 수을 곳은 없다. 우리는 흡혈의 자유와 반역의 재능을 헌납당했고 대신 생존의 굴욕만을 넘겨받았다.
--- p.70, 71
'당신의 비밀을 말해주세요.'
'무슨 비밀을 말하라는 건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세요.'
'당신이 보고 있는 그대로가 바로 나다.'
--- p.69
담배같은 소설을 쓰고 싶었다.
유독하고 매캐한, 조금은 중독성이 있는, 읽는 자들의 기관지로 빨려들어가 그들의 기도와 폐와 뇌에 들어붙어 기억력을 감퇴시키고 호흡을 곤란하게 하며 다소는 몽롱하게 만든 후, 탈색된 채로 뱉어져 주위에 피해를 끼치는, 그런 소설을 쓸 수 있기를, 나는 바랐다.
--- p.285 작가후기
담배 같은 소설을 쓰고 싶었다. 유독하고 매캐한, 조금은 중독성이 있는 읽는 자들의 기관지로빨려들어거 그들의 기도와 폐와 뇌에 들러붙어 기억력을 감퇴시키고 호흡을 곤란하게 하며 다소는 몽롱하게 만든 후 탈색된 채로 뱉어져 주위에 피해를 끼치는 그런 소설을.
--- 작가 후기에서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컴퓨터를 켜는 일이다. 물론 자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일도 그것을 끄는 일이다. 창이 없는 이 방에서 컴퓨터는 내 창이다. 거기에서 빛이 나오고 소리가 들려오고 음악이 나온다. 그곳으로 세상을 엿보고 세상도 그 창으로 내 삶을 훔쳐본다.
--- p.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