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삶…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잖아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호랑이 우리를 지나가는데, 문득 저 호랑이가 정말 저 우리를 빠져나오지 못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호랑이는 우리가 보지 않을 때, 사람들이 하나도 없을 때, 그러니까 이를테면 이런 깊은 밤… 빠져나와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돌아다니다가… 그러다가 새벽에 다시 우리로 돌아오는 게 아닐까… 호랑이뿐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그런 건 아닐까… 밤새 돌아다니느라 너무 피곤해서, 낮에는 저러고 있는 게 아닐까…” “왜 돌아오지요?” 남자가 묻는다. “갈 곳이 없으니까요. 시멘트 바닥에다가 딱딱한 건물들… 그리고 야생을 잃어버린 동물들이 사냥할 수 있는 곳도… 그걸 알면서도 매일 밤 나가보고, 또 돌아오고…”
--- p.45~46
나의 생은 그것이 전부일 줄 알았다. 자아가 생긴 이후 한 번도 다른 사람과의 생활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버림을 받고 그를 떠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사 년 전의 어느 봄, 그는 나를 이 낡고 오래되고 너저분한 가게에 팔아넘겼다. 그와 동행한 친구가 그에게, 너, 이거 아니면 시 못 쓴다면서, 하고 말했을 때, 비로소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깨달았다. 그는 쓸쓸하게 웃으며, 시는 이제 됐어, 라고 대답했다. 정이야 많이 들었지, 어쨌든 십오 년인데. 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지만, 나를 쓰다듬지는 않았다. 소설을 쓰기에는 너무 불편해. 그가 말했다. 틀린 글자는 일일이 수정액으로 지워야 하고, 문장의 위치를 바꿀 수도 없고, 불필요한 부분을 덜어놓았다가 나중에 붙이기도 힘들고. 요즘에야 누가 이런 걸 쓰냐. 게다가, 너무 오래된 것들이 나는 힘겨워.
--- p.71
“당신이 지금, 이런 상태인 것 같아서요.” “이런 상태?” “누군가 내 마음을 몹시 아프게 했죠.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냥 그게 다예요.” 그 여자는 조금 위쪽에 붙어 있는 다른 사진 한 장을 또 떼어냈다. 그 여자가 아주 어릴 때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 사진은 내가 구구단을 외우지 못해서 선생님께 혼이 난 다음이었죠.”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진 속의 표정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마찬가지라는 이야기군요.”
--- p.123~124
그는 먹기 시작했다. 쥐포와 대구포를 굽지 않은 채로 먹고,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먹었다. 달걀을 깨서 생으로 먹고, 치즈와 장조림과 오이피클을 먹고, 얼어 있는 식빵을 반쯤 녹여 딸기잼을 발라 먹고, 음료수와 맥주도 마셨다. 조리를 하지 않고는 먹을 수 없는 것들은 냉장고에서 꺼내어 한쪽에 쌓아두었다. 냉장고는 점점 비어갔다. 하지만 그의 허기는 채워지기는커녕 점점 커져만 갔다. 그가 냉장고의 한구석에 있던 빨간 상자를 발견한 것은, 냉장고가 반 이상 비워졌을 때였다. 정사각형 모양의 꽤 큰 상자였는데, 왜 그제야 눈에 들어왔는지 그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 상자를 꺼내기 전에 그는 잠깐 망설였다. “상자라는 건, 열기 전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르니까.”
--- p.139
*아침저녁으로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을 때, 나는 여름이 곧 떠날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여름을 보낼 준비를 천천히 시작했다. 여름이 좋아하던 오렌지색 밥그릇과 노란색 리본, 그리고 생선뼈 모양의 장난감을 작은 상자 안에 집어넣은 날, 일주일 만에 여름이 돌아왔다. 여름은 집 안으로 들어올 생각도 않고 창밖에 웅크리고 앉아 낮은 목소리로 야옹, 야옹 하고 울고 있었다. “왜 그러니, 이리 들어와.” 나는 방 안의 불을 끄고 찰리 헤이든을 튼 다음 여름이 좋아하는 말린 멸치를 일곱 마리나 손에 들고 이름을 불렀지만, 여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열린 창으로 차가운 바람이 밀려들었다. 여름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안녕이라고 말하듯 야옹, 하고 한 번 울고 몸을 돌려 어딘가로 달아나버렸다. 얼른 밖으로 나가보았지만 여름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여름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은행잎 하나만 발견했을 뿐이다. 은행잎의 한쪽에는 노란 물이 들어 있었다.
--- p.177
별로, 초콜릿을 살 일은 없지만, 생각하며 나는 오렌지 빛깔의 문을 밀고 초콜릿 우체국 안으로 들어섰다. 가게 안은 작은 우체국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표를 사는 곳이 있고, 소포를 붙이는 곳이 있고, 접수를 받는 곳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없었다. 흠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다음 누구 안 계세요, 하려는데 안쪽에서 작은 문 하나가 열리더니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한쪽에 놓인 소파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 초콜릿을 사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내 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 앞에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초콜릿 우체국이란 게 뭐 하는 곳인가요? 광고전단지에는 아무런 내용도 없어서…” “뭘 하는 곳이었으면 좋겠습니까?” 남자는 도리어 내게 반문했다. 우체국이니까 누군가에게 뭔가를 부칠 수 있는 곳이겠지, 그리고 그 뭔가는 아마도 초콜릿이겠지, 나는 생각했다.
--- p.321